영화 ‘아가씨’의 백작 캐릭터는 얄미워야 정상이다. 남 등쳐먹으며 사는 사기꾼이니까. “순진한 건 불법”이라고 믿는 그는 능청스런 입담으로 하나둘 여심을 홀린다. 그에게 흔들리지 않는 여자는 아가씨(김민희)와 하녀(김태리) 정도다.
그런데, 이 남자 묘하다. 이상하게 매력적이다. 하정우(본명 김성훈·38)라는 배우가 그 옷을 입으니 그야말로 날개를 단 격이다. 유려한 말솜씨와 단정한 애티튜드, 적당한 재치까지…. 박찬욱 감독의 눈은 역시 정확했다.
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로 한 카페에서 만난 하정우는 언제나처럼 유쾌하게 촬영 뒷얘기를 풀어냈다. 그는 “백작이라는 역할을 굳이 멋있게 연기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며 “톤을 귀엽게 잡고 나사를 풀면 좀 더 설득력을 가질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사기 당하는 경우를 보면 좀 어수룩하고 빈틈 있는 사람에게 속잖아요. 완벽하게 잘 짜여있으면 상대방이 더 의심을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박찬욱 감독님도 평상시 저를 보고 (그렇게) 귀엽게 하라고 유도를 많이 하셨어요. 시나리오 작업이나 편집하실 때도 그걸 강조하신 것 같더라고요.”
백작 특유의 능청스러움은 ‘비스티 보이즈’(2008)의 재현, ‘멋진 하루’(2008)의 병운과 얼핏 겹친다. 자칫 비슷한 캐릭터로 비쳐질 수도 있었다. 허나 이는 하정우의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똑같은 연기를 하더라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그려질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있었다.
“멋진 하루를 찍을 때 저는 20대 후반이었어요. 10년 나이를 먹은 뒤 비슷한 연기를 하면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기도 했죠. (그것만으로) 충분히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대부’ 1·2편을 보고 17년이 지나 3편이 나왔거든요? 근데 알 파치노는 똑같더라고요. 세월이 주는 애틋한 히스토리가 읽히더라고요. 뭔가를 설명하지 않아도 감동적인 부분이 있었던 것 같아요.”
아가씨 출연 제안을 처음 받은 건 전작 ‘암살’(2015) 뒤풀이 때였다. 그 자리에서 만난 박찬욱 감독이 작품에 대해 한참 설명하더니 ‘혹시 스케줄이 어떻게 되냐’고 물어왔다. 그렇게 두 달을 기다렸다 받은 시나리오는 꽤나 흥미로웠다. 감독의 캐릭터 위주 전작들과 달리 스토리를 따라가는 재미가 좋았다. 그의 결정은? ‘오케이(OK)'.
막상 작품에 들어가니 역시나 쉽지 않은 여정이 펼쳐졌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일본어 대사는 필수였다. 시나리오부터 일본어 문장으로 적혀있었다. 더욱이 ‘일본사람들이 듣기에 거슬리지 않을 수준이어야 한다’는 감독의 지령이 떨어진 상황, 할 수 있는 거라곤 공부밖에 없었다. 끊임없는 리슨 앤 스피크(Listen & Speak).
크랭크인하기 4개월 전부터 주 4회씩 제작사 사무실을 찾아 일본어 교습을 받았다. 배우들과 선생님들이 모여 앉아 ‘이 잡듯’ 일본어를 팠다. 하정우는 “운전하거나 운동하거나 잘 때까지 일본어 녹음한 걸 틀어놨다”며 “지금은 간판 정도 읽을 수 있는 수준이 됐다”고 전했다.
“아가씨를 찍으면서 전 이게 가장 힘든 부분이었어요. 모든 배우들이 열심히, 아니, 열심히를 넘어서 굉장히 큰 스트레스 속에서 준비를 했어요.”
그게 시작이었다. 우선 문어체 말투를 자연스럽게 소화하는 게 쉽지 않았다. 한 문장이 입에 붙지 않아 2시간 동안 촬영한 적도 있다. 한글 장·단음에 유독 민감한 박찬욱 감독의 주문대로 아나운서 수준의 발음을 구사해야 했다. 후시녹음만 10시간씩 6회차에 걸쳐 진행했다. 매 장면마다 호흡 하나, 머리카락 한 올, 눈동자 각도까지 신경을 썼다.
고된 과정이었지만 얻은 게 많다. 감독으로도 활동하는 하정우는 “(이번 작품을 통해) 감독이 영화를 대하는 자세와 태도에 대해 배웠다”며 “어떤 일이든 마음의 크기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감독이 사랑하는 만큼 그 작품이 갖는 매력과 생기가 커지더라는 게 그의 말이다.
그러면서 나홍진 감독을 함께 언급했다. 그는 “앞서 개봉한 ‘곡성’도 나홍진 감독이 6년 동안 준비하고 만든 영화였다”며 “그 기운이 느껴지기에 관객들도 기꺼이 지지를 보내는 게 아니겠느냐”고 했다.
“그런 지점에서 내 연출작들을 돌아보며 많은 반성을 했죠. 이 사람들처럼 내가 만든 영화를 사랑하고 잘 알았나?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됐죠.”
박찬욱 감독에게 또 작품 제안을 받으면 흔쾌히 응하겠느냐고 묻자 하정우는 한 발 뺐다. “시나리오를 봐야죠. 시나리오를 보고 내게 맞는 캐릭터라면 흔쾌히 결정을 하겠죠. 항상 결정은 흔쾌히(웃음). 다만 여러 조건이 맞아야죠. 일단 긍정 검토하죠. 그리고 우선순위로 검토하고. 그런 다음 모든 조건들이 충족됐을 때 굉장히 흔쾌히(웃음).”
아직은 먼 일이다. 예정된 차기작들이 줄줄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아가씨에 이어 ‘터널’이 8월 개봉을 앞두고 있다. 8개월간 이어질 ‘신과 함께’ 촬영은 이제 막 들어갔다. 그 다음 작품 ‘앙드레김’도 대기 중이다.
열일의 아이콘 하정우는 연출작 준비도 놓지 않고 있다. 이미 시나리오 구상에 들어갔다. 코리아타운 안에서 장사하는 사람들끼리 벌이는 소소한 블랙코미디. 연출 데뷔작 ‘롤러코스터’(2013)와 비슷한 류의 영화란다.
“아마 (개봉하기까지) 시간은 오래 걸릴 것 같아요. 아주 빨라야 3년 뒤?” 아, 궁금하다. 그의 유머, 그리고 그의 이야기.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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