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네스 배, "억류 735일 '소망'으로 살았다"

입력 2016-06-01 13:00 수정 2016-06-02 10:14

북한에 억류됐다가 735일만에 풀려난 한국계 미국인 케네스 배(48) 선교사가 1일 서울 용산구 서빙고동 온누리교회에서 ‘잊지 않았다’(두란노) 출간 기자간담회를 열고 억류 생활의 경험과 소감, 향후 계획 등을 밝혔다. 다음은 일문일답.



-책을 쓰기까지의 배경이 궁금하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가.

“많은 분들의 기도와 관심, 잊지 않고 기도해주신 덕분에 돌아왔다. 735일 동안 450여통의 편지를 받았다. 많은 분들에게 잊지 않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들은 내가 억류돼 있는 동안 구명운동에 참여하고 서명운동을 하고 여러 각도로 노력했다. 그래서 책을 출간하게 됐다. 내가 잊혀지지 않았고 수많은 분들의 기억 때문이다. 1년 반 동안 가족과 시간을 보냈다. 몸과 마음을 추스린 후에 책을 썼다. 친지들과 앞으로 일할 분들과 만났다.”

-책의 서문에도 나왔는데 외장하드를 실수로 가져가면서 억류가 됐다고 알고 있다. 외장하드에는 어떤 게 문제였나.

“반입한 외장하드에는 동영상이 문제가 됐다. 그중엔 내셔널지오그래픽이 제작한 북한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었다. 그런 영상들이 문제가 됐다. 그 외에도 6년 간 중국에서 사역했던 선교 편지와 사진, 동영상 등이 있었다.”

-국가전복혐의를 받기에 앞서 오랜 심문 과정이 있었다. 어떤 내용으로 조사를 받았나. 가장 힘들었던 것은?

“억류된 이후 4주간 심문 과정을 거쳤다. 오전 일찍부터 밤 11시까지 강도 높게 받았다. 그런 과정에서 동영상은 왜 가지고 왔는지, 누가 배후에 있는지, 누구에게 전달하려고 했는지 등을 알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 누구의 지시도, 전달 내용도 없다고 누차 반복했다. 하지만 그들은 혐의를 가지고 계속 조사했다.”

-억류 기간이 2년 하고도 5일이다. 노동과 병원 치료를 반복했는데 노동은 주로 뭘 했는가.

“평양 이송 이후 예심 4개월 반을 거쳐 15년 노동교화형을 언도받았다. 교화소에선 내가 유일한 죄수였다. 아침 6시에 기상해 오전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주 6일간 일했다. 처음에 했던 것은 농사관련 일이었다. 콩심기 등을 했다. 겨울에는 도랑을 파고 석탄 퍼나르기도 했다. 일부 보도에는 석탄을 캤다고 나왔는데 광산이나 갱도에서 작업한 것이 아니라 교화소 안의 석탄 창고에서 석탄을 옮기고 가루 내는 일을 했다. 여름에는 하천에서 돌을 주워 나르거나 땅을 팠다. 그러다보니 2~3달만에 체중이 줄었다. 결국 영양실조로 평양의 외국인전용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교화소 식사가 많이 부족했다. 노동강도에 비해 칼로리 소모 등이 많아 체중감소와 육체적 어려움을 겪었다. 체중은 27kg까지 감량이 됐다. 어지럽고 노동을 할 수 없어서 병원으로 이송됐다.”

-억류돼 있는 동안 ‘당신은 잊혀졌다. 아무도 당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을 계속 들었다고 책에 썼다. 그 말에 충격과 상처가 됐을 텐데.

“나를 담당했던 검사가 1년간 매주 찾아와 그 말을 반복했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미국 정부도 버렸다’는 식으로 얘기했다. 마음이 어려웠다. 하지만 억류 초기부터 기도하며 받은 말씀은 ‘내가 너의 구원자가 되리라’는 것이었다. 믿음을 잃지 않고 기도하면서 하루하루 이겨냈다. 나는 매일 충실하게 살려고 했다.”

-735일은 하루 하루는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보장되지도 않았던 시간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하루가 있었다면?

“여러 날이 있었다. 그래도 하루를 꼽는다면 아마 2012년 12월 12일로 기억된다. 당시 광명성 3호 인공위성을 발사한 날이었다. 당시만 해도 곧 돌아갈 것이란 희망이 있었다. 협조만 잘 하면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미사일 발사로 기대가 깨져버렸다. 집에 가기 어려울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엄청난 실망을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신앙의 마음으로는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주님의 마음이 떠올랐다. 가장 어려운 날이 가장 소망을 가진 날이었다. 그날 전 세계에 나의 억류가 알려졌다.

-지인과 연락이 자주 닿았나. 언제 결정적으로 풀려날 것이라고 알았나.

“처음엔 언론에 노출되지 원치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가고 교화소에 가면서 가족들이 적극 나서게 됐고 주위에서 구명운동을 펼쳤다. 그런 과정에 데니스 로드맨이 와서 나에 대한 실수 발언으로 상황이 달라지게 됐다. 그 결과 병원에서 교화소로 옮겨지게 됐고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석방 여론도 상승했다. 나는 억류 2년째인 2014년 11월 3일까지 돌아갈 줄을 전혀 몰랐고 그로부터 5일 후 미국의 특사가 와서 데려갔다. 그때까지도 북한은 나에게 어떤 얘기도 하지 않았고 석방 당일인 8일 오후 호텔로 옮겨져 그때 특별사면을 공지받았고 30분 후 특별사면 행사를 치렀고 4시에 비행기를 탔다.”

-18번째에 북한에 들어갔다가 일이 벌어졌다. 17번 동안 북한을 방문하면서 북한에 대 많이 알았을텐데 억류 이전전과 이후 북한에 대해 달라진 지식은 무엇인가.

“억류 전까지 (북한을) 많이 알고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억류되면서 그들이 어떤 마음과 사상을 가지고 살고 있는지 절실히 느껴야 했다. 그들 체제가 곤고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2년간 그들 속에서 배운 것이 있다면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민족이자 같은 고민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런 점에서 북한 정부와 주민은 별개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북한 주민에 대한 관심과 사랑,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억류 되기 전까지 17차례 북한을 방문했다. 그 기간 동안 북한의 교회도 방문했는가.

“평양에서 3번 교회에 갔다. 칠골교회로 김일성 외가에서 세운 교회로 알고 있다. 예배는 한국의 교회와 거의 흡사했다. 같은 찬송가와 설교가 있고 중간 중간 신자들이 ‘아멘’도 하더라. 기도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했다. 그런데 진정한 예배로 볼 수 없었다. 설교의 결론은 항상 김일성 수령 찬양과 남한에 대한 비방으로 마무리 하더라.”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곳에 있으면서 많은 분들의 격려와 사랑을 받았다. 이를 알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편지 하나하나가 ‘당신을 잊지 않고 있다’ ‘함께 서있다’ ‘기도하고 있다’는 메시지가 하루하루 설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동시에 북한의 동포들은 삶 전체가 고립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느꼈다. 우리가 그들을 외면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품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기대하게 됐다. 수감돼있는 대한민국 국민 3명에 대해 석방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이 점은 같은 수감자 입장에서 부탁드리고 싶다. 캐나다의 임현수 목사도 마찬가지다. 그는 병원과 교화소를 오가고 있는 것으로 들었다. 우리의 관심과 사랑이 그들을 지킬 것이고 돌아오게 할 것이다. 북한의 어려움을 보면서 앞으로 평화통일의 날이 올텐데 이에 앞서 민간차원에서 인도주의적 도움과 취약 계층에 대한 관심은 끊어지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속적인 사랑을 보일 때 밖을 이해하고 협력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될 것이다. 그것을 2년간 절실히 느꼈다. 북한에 대해 더 알고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735일을 한 단어로 말한다면 ‘소망’이라고 부르고 싶다. 소망의 끈을 함께 붙들어 달라.”

-앞으로도 북한 선교의 꿈을 이어갈 것인가.

“교화소에 있을 때 ‘다시 돌아오고 싶다’고 말했다. 물론 현재 상황은 불가능해 보인다. 앞으로 한국에서 탈북민이 잘 정착하고 사회에서 적응하며 성장하도록 돕는 일을 하고 싶다. 북한과 세계를 잇는 다리 역할을 감당하고 싶다. 이를 위해 북한 동포를 위한 NGO를 설립해 북한 취약계층과 외부 탈북민을 섬기는 것을 계획하고 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