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간만에 화려한 액션이 보고 싶어 워쇼스키 형제(지금은 남매지만)의 ‘매트릭스(1999)’ DVD를 꺼내봤다. 중국인 무술감독이 안무를 해선지 중국영화 냄새가 풀풀 나긴 했어도 일단 총격신 등 액션 장면들은 훌륭했다. 그럼에도 왠지 오로지 액션만으로 이 영화를 평가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래서 이 영화에 관한 이런 저런 리뷰들을 찾아봤다. 그 결과 이 영화에 대한 한 논평이 눈에 띄었다. ‘가장 훌륭한 철학영화 중 하나’. ‘철학영화’라고? 그렇다. ‘매트릭스’는 단지 액션을 강조한 SF라기보다 멋진 철학영화라는 것이다. 그 같은 평가에 붙여진 설명을 소개하자면 이렇다.
‘무엇이 현실(reality)인가? 현실을 왜곡하는 것은 외부의 악의적인 힘이 아니라 자신의 감각과 사고다. 이 영화는 이 같은 철학적 사고의 틀을 제공함은 물론 플라톤의 이데아와 W E B 뒤부아의 이중의식 개념을 잘 설명하고 있을 뿐 아니라 데카르트의 독자적 사고능력에 관한 논의를 가능케 한다.’
글쎄, 이 설명이 적확한 것인지는 잘 알 수 없어도 ‘매트릭스’에 어떤 철학적 의미를 부여할 수는 있겠다. 사실 모든 영화는 철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이런 원론적인 얘기 말고 실제로 ‘철학적인 영화’들이 있다. 그 중 비교적 잘 알려진 것들을 살펴보자.
1. 로프(Rope, 1948): 앨프리드 히치콕이 연출한 이 영화는 ‘반(反)실존주의’ 영화로 분류된다. 실존주의 원칙에 따라 동료 학생을 살해한 학생들을 다루고 있다.
2. The Fountainhead(1949): 아인 랜드의 철학 소설을 킹 비더가 연출했다. 개인주의에 관한 멜로드라마.
3. 제7의 봉인(The Seventh Seal, 1957): 잉그마르 베르히만이 연출한 스웨덴 영화. 삶과 죽음의 의미를 필사적으로 탐색하는 인간의 노력을 그려 ‘실존주의의 영화적 모델’이라고 불린다.
4. 달콤한 인생(La Dolce Vita, 1961): 이 역시 할리우드 영화가 아닌 이탈리아 영화다. 페데리코 펠리니 연출. ‘좋은 삶이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각자가 인생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달려있다’는 철학적 인식이 영화의 바탕에 깔려있다. 펠리니가 영화에서 잡아낸 로마의 풍경은 반 고흐의 작품 ‘한밤의 카페 테라스(Cafe Terrace at Night)’를 연상시킨다는 평을 받았다.
5. 사랑과 죽음(Love And Death, 1975): ‘천재’ 소리를 들어 넘치지 않는 우디 앨런의 영화다. 전쟁과 평화, 죄와 벌, 아버지와 아들에 관한 코미디로 카프카적 불안과 키에르케고르적 공포를 직조(織造)해 만들었다.
6. 챈시(Being There, 1979): ‘핑크 팬더’ 시리즈로 유명한 피터 셀러즈의 호연이 돋보인 핼 애쉬비의 영화. 하이데거의 철학을 바탕으로 TV의 존재 의미를 지적으로 천착했다.
7. 앙드레와의 저녁식사(My Dinner with Andre, 1981): 거장 루이 말이 연출한 ’먹방‘ 영화. 두 남자가 식당에서 식사하면서 나누는 대화가 영화의 전부다. 앙드레는 영적, 이상주의적 세계관을 지닌 남자이고 월러스는 현실적이고 인간주의적인 철학을 지닌 남자로 둘은 식사를 하면서 인간의 조건과 소통, 그리고 인생에 관해 끊임없이 대화한다.
8. 블레이드 러너(1982): 리들리 스콧 연출, 해리슨 포드 주연의 SF. 할리우드가 사랑한 SF 작가 필립 K 딕의 소설이 원작이다. 모든 면에서 인간과 다르지 않은 안드로이드를 통해 인간의 정체성 문제와 실존주의를 아울러 다뤘다.
9. 바톤 핑크(Barton Fink, 1991): 컬트적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있는 코엔형제의 영화. 일상의 파시즘을 거론하면서 천당과 지옥의 메타포를 그려냈다.
10. 애딕션(The Addiction, 1995): 역시 컬트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아벨 페라라 감독의 영화. 뱀파이어 영화의 탈을 쓴 ‘모럴 필름(moral film)’. ‘인간의 역사는 인간의 나약함과 혼란을 숨기려 뒤집어쓴 가면에 불과하며 인간의 문명은 전쟁에서 스러진 시신 위에 쌓인 미처 묻히지 못한 시신들의 무더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11. 트루먼 쇼(The Truman Show, 1998): 피터 위어 감독. 데카르트에서부터 사르트르까지, 플라톤에서 쇼펜하워까지 원용하면서 무엇이 진실인가를 모색한다. 특히 트루먼이라는 존재를 탄생시킨 인간을 창조주라는 관점에서 ‘신’이라고 할 때 신은 도덕으로부터 탈피한 존재여야 하는가, 아니면 윤리 도덕적 존재여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12. 메멘토(2000):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만든 기억, 인식, 슬픔, 자기기만, 복수에 관한 이야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 바닥에 깔려있다.
13. 이터널 선샤인(The Eternal Sunshine, 2004): 짐 캐리 주연, 미셸 공드리 연출. 초현실주의와 낭만주의의 결합. 인간 간의 기억, 관계, 상실 등을 천착한다.
14. The Fountain(2006):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판타지 혹은 SF영화. 영성(靈性)과 영생(永生), 삶과 죽음, 변치 않는 사랑, 생명의 나무와 영원한 젊음의 샘 등의 토픽을 망라한다.
김상온 (프리랜서 영화라이터)
[김상온의 영화이이갸]<72> 철학영화
입력 2016-05-30 16: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