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혐오한다’ 혐오의 일상화, 씁쓸한 대한민국

입력 2016-05-28 08:02

‘강남 살인 사건’은 ‘혐오’라는 두 글자를 한국 사회에 아로새겼다. 경찰 수사 결과 ‘여혐’이 아닌 조현병(정신분열)에서 비롯된 ‘묻지마 살인’이라는 게 드러났음에도 한번 불붙은 논란은 사그라들 줄 모른다.

일상화된 혐오가 우리 사회에 만연하다. ‘여혐’이나 ‘남혐’만의 문제가 아니다. 과거에는 이주노동자나 중국동포 등 사회적 소수를 겨냥했던 혐오가 요즘은 일상에서 흔히 마주치는 이들을 표적으로 삼는다. ‘개념 없는’ 아저씨, 기회균등전형으로 대학 문턱을 넘은 학생 등이 그들이다.

혐오의 대상을 일컫는 말도 쉽게 생겨나고 퍼져나간다. ‘개(犬)’나 ‘충(蟲)’자를 덧붙이는 것으로 충분하다. ‘개저씨’ ‘기균충’ 등이 그렇게 생겨났다.


‘개저씨’ ‘기균충’

대기업 차장 신모(42)씨는 요즘 의기소침하다. 직장 후배의 수군거림에 ‘개저씨’(개+아저씨)로 오르내리면서부터다. 신씨는 출퇴근 지하철에서 ‘쩍벌’ 대신 다소곳이 허벅지를 모으게 됐다. ‘아재’라고 손가락질 당할까봐 실없는 농담을 건네기도 망설여진다고 한다.

신씨는 27일 “30도를 넘는 날씨에 허리띠 풀고, 양말 좀 벗은 게 뭐가 그리 큰 죄라고 그런 말을 들어야 하느냐”면서 “말끝마다 욕설을 덧대고 아슬아슬한 음담패설을 이죽거리는 부장이 바로 ‘개저씨’”라고 말했다.

사회적 배려는 혐오의 쉬운 먹잇감이다. 대학생 김모(20)씨는 지난해 서울의 한 명문대에 기회균등전형으로 입학했다. 차상위계층으로 일종의 ‘배려’를 받은 셈인데 그 사실을 털어놓은 게 화근이었다. 입학 전형을 말하자 주위가 순간 싸해졌다. ‘정시로 입학했다’ ‘외고를 나왔다’는 대화가 오가던 자리였다. 김씨는 “1년이 지났지만 놀랐다는 듯 그 묘한 표정들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씨는 ‘원래 스펙대로라면 인서울 하위권도 떨어졌을 기균충들’이라는 게시물이 교내 커뮤니티 사이트에 올라올 때면 먹먹하다고 했다. 그는 “숨기려고 한 건 아니지만 새로 가입한 동아리에서는 입학 전형을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혐오는 존중과 배려보다 힘이 세다. 캣맘 한모(33·여)씨는 자정이 넘어서야 고양이 사료를 챙겨 집을 나선다. 지난해 10월 서울 성동구의 한 닭갈비집 앞에서 사료를 주다 들은 호통 탓이다. 당시 닭갈비집 주인은 다짜고짜 “더러운 길고양이는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며 “사료를 두 번 다시 주지 말라”고 소리쳤다. 한씨는 “길고양이 신세가 된 것 같았다”면서 “이해해주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손가락질 받을 일을 한 건 아니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혐오라는 탈

이 같은 ‘묻지마 혐오’의 배경은 무엇일까. 심화된 불평등과 승자독식을 부추기는 ‘정글자본주의’ 논리, 경쟁과 효율을 우선으로 두는 교육시스템이 낙수효과처럼 번지는 혐오의 주범으로 꼽힌다.

김윤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불평등이 심해지면서 한국 사회에서 긴장과 경쟁, 갈등 그리고 적대문화가 커졌다”며 “이 같은 배경에서는 존중과 배려보다 혐오를 선택하기 쉽다”고 말했다. 심화된 불평등이 ‘나만 잘살면 된다’는 식의 생각을 부추기고 혐오를 부른다는 설명이다.

약육강식의 정글자본주의도 혐오의 주된 원인으로 꼽힌다. 김 교수는 “우리 사회가 타인을 짓밟고 올라가야 생존할 수 있는 정글처럼 변하고 있다”면서 “사회적 신뢰와 유대감이 약화되면서 타인을 경쟁자로 인식하고, 경쟁에서 탈락하는 이들을 무시하고, 나아가 혐오하게 된다”고 말했다.

경쟁과 효율을 강조하는 교육시스템이 혐오를 방조한다는 분석도 있다. 개인 차원의 성공만을 목표로 삼는 교육이 사회적 약자를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는 여유를 내어주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김석호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타인보다 우위에 섰을 때 비로소 가치를 찾는 우리 사회의 교육시스템 아래서는 기회균등전형 등이 공정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지고 혐오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공부를 못해도 사회적 약자라는 이유만으로 더 좋은 대학에 간다는 반감이 혐오를 조장한다는 설명이다.

칼럼니스트 박권일씨는 27일 “약자의 무임승차로 사회적 문제가 생겨났다‘는 식의 왜곡된 시선이 혐오를 부른다”고 말했다.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 없이 약자를 향해 던지는 불만이 아래로 흘러내려 혐오가 된다는 논리다. 그렇게 ‘갑’은 ‘을’을, ‘을’은 ‘병’을, ‘병’은 ‘정’을 미워하고 싫어하게 된다.

신훈 오주환 기자 zorb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