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영이가 입원한 무균병동 1인실에 아랍계 아이가 있었다. 부모가 함께 왔는지 가끔 히잡을 쓴 엄마와 구렛나루가 멋진 아빠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처음엔 여기까지 치료하러 올 정도면 만수르 정도의 중동 갑부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진짜 부자들은 미국으로 치료하러 가고, 여기 온 아이들은 그 나라에서 평범하거나 가난한 축에 속한다고 한다. 수억 원에 달하는 치료비와 교통비를 모두 그 나라에서 무상으로 대주기에 가능한 일이다. 심지어 보호자 1인 상주 원칙에 무균병동에 못 들어가는 아빠를 위해 병원 앞 특급 호텔 숙박비까지 책임져 준다고 한다. 그에 비해 몇몇 한국 아빠들은 20층 무균병동 앞 쇼파에 ‘살림’을 차리고 산다.
주말 내내 인영이가 잘 먹고 잘 놀아 편안해졌는지 처음으로 의료비 영수증 내역이 눈에 들어왔다. 어제 한 골수검사로 47만2369원을 냈다. 4만원이 급여항목이고 나머지는 모두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비급여 항목이었다. 특히 43만원의 3분의 1 정도인 14만원은 선택 진료료 명목이었다.
선택? 우리가 애초 선택하고 싶었던 것은 지난 주 수요일 퇴원 전에 수면으로 골수검사를 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병원 측은 입원환자는 전신마취를 하거나 그게 싫으면 생으로 검사를 받아야지 수면검사는 받을 수 없다고 했다. 이유를 묻자 “원래 그렇다”고 했다. 결국 우리는 퇴원 후 이틀만에 다시 새벽 6시에 자는 아이를 깨워 서울까지 차를 몰고 외래로 수면 검사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 내가 낸 47만원 검사비용 중 14만원이 선택 진료비란다.
예전에 비해 암 환자에 대한 복지지원제도는 많이 좋아졌다. 급여항목의 95%는 건강보험공단에서 부담해준다. 하지만 골수검사 같은 검사료, 일부 항암제들은 비 급여 항목이다. 이런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특별히 소아암 환자의 경우 나라에서 비 급여까지 포함해 연간 3000만원까지 치료비를 지원해 준다. 그런데 맞벌이 부부인 우리에게까지 그 혜택이 돌아오지 않는다. 10년 넘게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세금을 꼬박꼬박 냈는데 정작 필요할 때 우리는 ‘너무’ 부자였다. 지난 주 모 방송사 작가가 전화가 왔다. 큰 병으로 어려움을 겪는 가정을 소개해주고 도움을 주는 프로그램인데 인영이를 소개하고 싶다고 했다. 저희는 맞벌이고 하니 더 어려운 가정을 소개하면 좋겠다는 말에 작가 분은 요즘은 선생님같은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직장인 가정도 많이 소개해준다고 했다. 복지 예산 기사를 쓸 때 별 생각없이 자주 언급했던 ‘사각지대’에 내가 들어가 있었다.
기사를 찾아보니 기초연금처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소아암 환자의 치료비를 국가가 전액 부담해 주는데 드는 비용은 연간 5000억원이라고 한다. 5000억원. 적은 돈은 아니다. 예전 추가경정예산 편성 취재를 할 때 “10조원도 안 넘는데 어디다가 갖다 붙이냐”는 질문에 예산당국 관계자는 “이기자, 1조원이 얼마나 큰 돈인 줄 알아?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고속도로에 만원 짜리를 다 깔아도 1조원이 안돼”라고 답했다. 그렇다고 정부가 그 큰 돈들을 허투루 안 썼을까? 22조원이 들어갔지만 2조2000억원의 효과도 보지 못한 4대강 사업을 비롯해 경기활성화란 명목으로 반짝 효과만 본 수많은 지원금 제도들...
10여년 전 총선 당시 거리에서 봤던 선거 현수막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있다. 지금은 없어진 노동당이었던 것 같은데 ‘국가가 우리에게 해준 것이 무엇인가?’ 였다. 아이가 아프고 나서 막연히 복지예산 100조원 시대에 그래도 뭔가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내 자신이 한심해진다. 그리고 그 아랍에서 온 환자 아이의 아빠가 쇼파 침낭에서 구부리고 자고 있는 ‘한국 아빠’들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해진다. 부러우면 지는 건데 나는 그 아빠가 부럽다.(3월6일)
이성규 기자 zhibag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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