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때 운동권과 거리가 멀었다. 신입생 시절 돌 한번 던져본 이후 시 쓰고 연애하며 시절을 보냈다. 목사님이셨던 아버지는 기자 합격 소식을 듣고 노조는 가입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러나 탈 수습과 동시에 노조에 가입하는 것은 끽연자들의 식후땡처럼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후 지금까지 나는 조합원이다. 운 나쁘게(?) 파업 당시 노조 전임자를 하면서 상처도 받고, 파업 직후 동기들보다 차장 진급도 2년 늦었다. 첫해는 파업에 따른 징계 기간 중이란 이유로 제외됐고, 두 번째 해는 그냥 물먹었다. 세종에 자진 귀향온 뒤로는 물리적 거리를 핑계로 노조를 멀리했다. 동기 노조위원장이 도와달라고 보직 하나 맡아달라는 간청에도 파업 때 할 만큼 하지 않았냐며 모멸차게 거절했다.
그런데 인영이가 아프자 대부분의 조합원들은 자기 일처럼 아파했다. 기자협회보에 제보도 하고, 십시일반 헌혈증과 성금도 모았다. 노조 홈페이지 대문에는 ‘인영아 힘내’라며 인영이 사진도 올라왔다. ‘가난한’ 노조지만 우애만큼은 눈물 날만큼 깊었다.
아내는 대형은행에 다닌다. 나와 입사연도도 비슷하지만 애 둘을 키우며 육아휴직을 4년 한 죄로 여전히 만년 대리다. 아내가 속한 노조는 전임자가 우리 노조 전체 조합원 수만큼 많다고 들었다. 그런데 노조의 그 누구도 아이가 아팠던 지난 한달 새 아내에게 위로전화 한통 해주지 않았다. 전국적인 지부 망을 갖춘 노조인데 말이다. 아내가 간병 휴직 제도에 대해 잘 몰라 고민할 때 “노조에 물어보면 되지. 왜 혼자 고민하냐”고 면박을 주자, 아내는 오히려 그런 나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집에 돌아와 아내가 자녀가 아플 때 노조에서 위로금 500만원 주는 제도가 있다는 것을 듣고 전에 같은 지점에서 근무한 적이 있던 노조 관계자에게 전화를 해서 물어봤단다. 그 분의 설명은 “아직 본인이 신청하지 않았다. 본인이 왜 자기가 이 위로금을 받아야하는지 사유를 써서 신청을 하면 노조가 심사를 한 뒤 지급 여부를 결정한다”였다. 그 말을 전해 듣고 아내에게 신청하지 말라고 했다.
노조는 그런 존재가 되서는 안 된다. 노조는 조합원들에게 고향과 같은 존재여야 한다. 타향서 잘 나가고 편할 때는 까맣게 잊어버리지만 상처받고 괴로울 때 생각나고 그리워지는 곳. 조합원에게 스스로 아프고 힘든 것을 입증하라는 노조는 노조가 아니다. 노동개혁 관련 기사를 쓸 때 ‘귀족노조’라는 표현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귀족노조라도 그 노조에 속한 조합원들에게 힘이 되어주면 그것만으로도 존재할 가치가 있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상처를 입은 말단 조합원이 선뜻 다가설 수 없는 거대한 노조는 귀족노조도 아니다. 단지 귀족일 뿐이다. 인간에 대한 애정이 빠져있는 거대담론처럼 무서운 것도 없다.(3월3일)
이성규 기자 zhibag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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