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일 동안 병원 잠을 잔 인영이가 드디어 집에 돌아왔다. 겨울바람이 물러갔고, 인영이 수치도 안정돼 예정대로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인영이는 퇴원을 앞두고 가슴에서 포트 바늘을 빼고 자유로워졌는데도 걸을 때 링거 대를 놓지 않았다.
‘그래, 앞으로 3년간은 너의 생명 줄이다. 힘들더라도 지금처럼 꽉 잡고 버티는 거야.’
오후 5시경 집에 오자마자 인영이는 분주했다. 그동안 못 가지고 놀았던 소꿉놀이, 뽀로로, 타요 장난감을 마루 한가득 펼쳐 놓고 하나하나 순서대로 갖고 놀았다. “롸면”을 연달아 외쳐 짜왕을 끓여주니 정말 두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언니는 긴장했는지 8시가 되자 골아 떨어졌지만 그런 언니를 보며 낮잠도 안잔 인영이는 정신력으로 10시까지 버텼다. 병실 다른 환우들 눈치 볼 필요 없이 안방 침대에서 엄마랑 큰 소리로 떠들어대다가 어느새 엄마와 함께 잠들었다. 잘 때 걸리적 대던 수액 줄도, 새벽잠을 깨우던 혈액채취도 없이 인영이는 내일 아침까지 단잠을 잘 것이다.
아내와 나는 집에 돌아온 인영이 모습을 보고 웃다가 울었다. 그렇게 하고 싶어 하던 술래잡기와 미끄럼틀을 밤새 해줄 수 있는 마음인데, 인영이는 단 한달 새 다시 걸음마를 배우는 어린아이처럼 잘 걷지 못했다. 눈감고도 잽싸게 올라가던 미끄럼틀은 엄마아빠 손을 잡지 않고 혼자선 올라서지 못했고, 숨어있는 엄마아빠를 찾는 걸음은 뒤뚱뒤뚱 거렸다. 독한 항암제에 장이 망가졌는지 잦은 설사에 엉덩이가 헐어서 물로 씻어줄 때마다 울었다.
인영이는 이틀 뒤면 다시 병원에 외래로 가서 수면상태로 허리뼈에 구멍을 뚫는 골수와 척수검사를 해야 하고, 일주일 뒤인 다음주 수요일엔 2차 항암을 위해 입원해야 한다. 그 전에라도 체온이 38도가 넘으면 이유 불문하고 다시 서울에 응급실로 달려가야 한다. 단 한시도 엄마아빠가 긴장을 늦춰선 안 된다. 그래도 나머지 세 여인이 모두 잠든 지금, 맥주 한 캔으로 긴장을 풀고 있다. 그리고 행복하다. 내 집에 내 가족이 모두 편안히 잠들어 있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할 줄 몰랐다.
인영이가 무사히 퇴원할 때 까지 기도해준 분들을 떠올린다. 아마 그들의 기도와 격려가 없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것 같다. 이제는 그분들을 생각해서라도 우는 것은 그만 끝내야겠다. 예전 파업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이런저런 이유로 함께 하지 못한 선배들을 불러내 술 먹으면 울던 버릇이 도진 느낌이다. 이제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웃으면서 인영이 곁에 서 있으리라 다짐한다. 내 인생에 아주 특별하고 멋진 3년이 기다리고 있다. 세기농(세종기자농구단)의 영원한 폭탄사 ‘슛~ 골인~’처럼 슛은 던져졌고, 공은 포물선을 그리며 림을 향해 출발했다. 슛을 던진 내 손끝의 감은 좋다.
이성규 기자 zhibag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