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아빠다51>구악 아빠

입력 2016-05-24 18:33 수정 2016-05-24 19:12
가정보다 특종을 좇던 기자였습니다. 올해 초 3살 딸아이가 급성백혈병 진단을 받고서야 ‘아빠’가 됐습니다. 이후 인영이의 투병 생활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땅의 모든 소아난치병 환우와 아빠엄마들을 응원합니다.

병원에 민원을 했다. 인영이는 외래 진료를 받을 때마다 채혈을 해야 한다. 혈액수치가 정상인지, 수혈이 필요한 지 체크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지금까지는 인영이 가슴에 삽입돼 있는 중심 정맥관에 바늘을 꼽아 채혈을 했다. 그런데 병원에서 생후 36개월 이후부터는 어른과 똑같이 외래 채혈실에 가서 손등에서 혈관을 찾아 주사로 채혈을 해야 한다고 했다. 전에 한번 손등에서 채혈을 할 때 혈관을 찾지 못해 바늘을 몇 번 찔렀고, 인영이는 고통스러워했고 손등은 시퍼래졌다. 가슴정맥관은 단 한번 가슴에 바늘을 꽂으면 되지만, 이제 막 만 3살을 넘긴 인영이에게 손등 채혈은 항암주사보다 더 큰 공포다.
병원 도착해 3시간을 대기해 1분 진료를 마친 인영이가 돌아가는 고속버스 안에서 잠들었다. 치료과정에서 아픈 아이의 고통을 덜 받게 노력하는 부모들은 의료진에게 '찍히기' 십상이다.

그래서 오늘 외래를 앞두고 병원에 아는 분께 부탁을 했다. 최소한 집중 치료기간인 올해까지는 가슴 정맥관으로 채혈을 해 달라고 했다. 그런데 주사실에서 가슴 정맥관으로 채혈한 뒤 나온 아내 표정이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한 간호사가 이렇게 민원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며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아내에게 면박을 줬는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나왔다고 했다.
지하에 내려가 아침도 굶은 인영이에게 칼국수를 사 먹이다 열불이 나서 3층 주사실로 뛰어 올라갔다. 그 간호사에게 민원을 한 장본인은 나라고 말했다. 그런데 나는 하나도 부끄럽지 않다고 했다. 오히려 부끄러워할 것은 어린 환자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지 못하는 당신들이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말했다. 간호사는 아내에게 한 말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한 말인데 오해가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병원 규정 상 그렇게 돼 있어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그런 규정이 정말 있다면 따르겠다고 사무실에 들어갔다. 그러나 함께 찾아본 병원 규정에는 미취학 아동은 가슴 정맥관으로 채혈한다고 적혀 있었다. 수간호사로 보이는 분은 이건 항암치료 시 소아 규정이고, 오늘은 인영이가 항암치료를 받는 날이 아니기 때문에 오늘 인영이에게 해당이 안 된다는 이해할 수 없는 이유를 댔다. 자신들도 해주고 싶지만 인력 부족 상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인영이 가슴에 삽입돼 있는 케모포트라는 중심 정맥관. 여기를 통해 채혈을 하면 따끔 한번 바늘찔리면 그만이지만, 손등 채혈은 어린 아이들에겐 항암치료보다 더 한 고통이다.

알아보니 다른 백혈병 전문 대형병원은 가슴에 중심 정맥관을 심은 미취학 아동에겐 전문 간호사가 무조건 중심 정맥관에서 채혈을 해준다고 했다. 말은 안했지만 이렇게 말했으면 “그럼 그 병원 가시던가요” 식의 대답이 나올 것이다.
오후 3시36분 예약한 외래 진료를 위해 12시에 세종터미널 고속버스를 타고 출발해 병원에 2시에 도착했다. 진료 1시간 30분전에 채혈을 했지만 외래 진료는 1시간 넘게 지연 돼 5시가 되서 1분 남짓의 교수님 면담을 했다. 인영이는 다시 2시간 넘게 집으로 가는 길을 가고 있다.
의료진이 보여준 내부 규정. 여기엔 분명히 '초등학교 미만 환아로 중심정맥관이 있는 경우 검체 채혈을 시행한다'고 돼 있다. 다른 대형병원도 이를 따르고 있는데 성모병원은 인력부족을 이유로 36개월 이상 환아는 성인과 똑같이 외래 채혈실에서 채혈을 하게 한다.

처음에는 불합리한 병원 관행에 따질 때마다 아내는 나를 말렸다. 그래봤자 바뀔 것은 없고 인영이한테 더 해가 될까 무섭다고 했다. 그러던 아내가 오늘은 3층으로 뛰어올라가는 나를 잡지 않았다. 내 얘기를 듣더니 자기도 속이 후련하다고 했다.
환자와 환자 가족은 을이 아니다. 고통 받지 않고 치료를 받을 권리가 있다. 가슴정맥관으로 채혈을 하는 데 드는 시간은 5분 정도다. 정 백혈병 전문 주사실 인원이 부족하면 채혈실에 가슴정맥관 채혈이 가능한 의료진을 한명만 배치해놓으면 된다. 입원환자한테까지 꼬박꼬박 주차비 받아가면서 환자들의 불편과 고통을 매번 ‘인력 부족’이라는 이유로 외면하는 것은 성모 마리아의 마음이 아닐 것이다.
1시간 넘게 지연된 외래 진료를 지루하게 기다리는 아빠와 인영이. 웃고 있지만 웃는게 아니다.

오늘처럼 앞으로는 할 말은 하고 살아야겠다. 안그러면 화병이 날 것 같다. 물론 다음번 인영이 외래 진료 때도 난 민원을 할 것이다. 입원 순서 앞당기기 등 내 아이 민원으로 다른 환우가 피해를 받는 민원은 하지 않겠지만 의료진이 조금 불편하고 인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내 아이가 안받아도 될 고통을 받는 것은 꼬박꼬박 민원을 해서라도 아프지 않게 해줄 테다. 난 구악 아빠다.

이성규 기자 zhibag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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