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최대한 빨리 제 방에 숨어 글을 쓰고 싶다"

입력 2016-05-24 16:36 수정 2016-05-24 16:41
한국 첫 맨부커상 수상작가인 한강이 24일 마포구 홍대 인근 한 카페에서 귀국 보고회를 겸해 기자간담회를 갖고 있다. 곽경근 선임기자

“택시를 타고 오다 길이 막혀 지하철로 갈아 타고 왔어요. (염려하신 것과 달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네요(웃음). 이 자리 끝나면 제가 쓰고 있는 작업으로 얼른 돌아가고 싶어요. 최대한 빨리 제 방에 숨어서 책을 쓰는 것이 (유명세를)극복하는 방법이겠지요.”

바깥에는 여름을 재촉하는 비가 내렸다. 카메라 셔터 소리가 연신 차르르 울렸다. 가뜩이나 조용하고 나직한 목소리가 묻힐까 주최 측이 열려할 정도. 일본의 NHK 등 외신까지 참석해 간담회장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포토타임을 간신히 끊고 착석한 그는 “갑자기 유명해져 (사인 공세에) 불편하지는 않냐”는 질문에 배시시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유명세를 즐기기보다 글 쓰는 게 더 좋은 천생 작가다.

한강(46)이 24일 ‘귀국 보고회’를 가졌다. 지난 17일 새벽, 장편소설 ‘채식주의자(The Vegetarian·창비 출판사)’로 한국에 영국의 맨부커상 첫 수상의 낭보를 날린 지 딱 일주일만이다. 아시아 첫 수상이기도 했다. 서울 마포구 홍대 인근의 한 카페에서 열린 이날 행사는 신간 소설 ‘흰’(난다 출판사) 출간 기념을 겸했다.

◇“수상 예상하지 못했다”=“사실 영국에는 출판사 편집자와 신작(‘흰’) 출간을 상의하려고 가벼운 마음으로 갔습니다. 수상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이렇게 운을 뗀 그는 수상 발표 당시의 기분을 묻자, “시차 때문에 거의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졸린 상태였다. 현실감이 없는 상태에서 상을 받았다. 의외로 담담했다”면서 “상 받은 ‘채식주의자’는 벌써 11년에 쓴 소설이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건너온 소설에 대해, 이렇게 먼 곳에서 상을 받는다는 게 기쁘다기보다 이상하게 느껴졌다”고 했다.

공동 수상자인 영국 번역가 데버러 스미스(28)에 대한 견해를 묻는 질문도 쏟아졌다. 그는 “‘채식주의자’는 스페인어, 일어 등 여러 언어로 번역됐지만 읽을 수 없는 책이었다. 영어는 유일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 반갑더라”고 농을 했다. 이어 “소설은 목소리의 질감을 담는 톤이 중요하다. 데보라 역시 톤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번역자였다. 뭔가 마음이 통하는 것 같았다”고 소개했다.

그는 지난해 영국에서 열린 번역 워크숍 참가한 경험도 소개했다. 한 줄을 번역하는데 20가지 가능성이 있는 걸 배우고 언어의 섬세함에 감탄했다는 그는 “번역은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연결하는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평했다.

◇“한국 문학 세계화, 이제 시작이다”=‘채식주의자’는 현재 27개국에서 번역 판권을 계약했다. “발트해 라트비아, 인도 남부 소수 언어로 내고 싶다는 제안도 받았다”고 에어전시인 케이엘매니지먼트 이구용 대표는 전했다.

한강은 세계적 작가로 우뚝 선 성취를 자신이 젖줄을 대고 있는 한국 문학 전체의 공으로 돌렸다. 그는 “한국 작가들, 시인들의 작품을 읽으며 한국 문학 속에서 자랐다. 한국 문학에 빚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좋은 번역이 나오고 있고, 외국 편집자들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세계시장에서 우리 문학은 점점 더 읽혀질 것이고, (한국 문학 세계화) 이제 시작”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러면서 “동료·선후배들의 좋은 책도 많다. 묵묵히 자신의 방에서 글을 쓰는 그들의 책도 함께 읽어달라”고 말했다. 또 “어려운 시, 어려운 소설은 없다. 작품으로 질문을 던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조금 더 읽어준다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신작 소설 ‘흰’은=시와 산문, 소설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책이다. 강보, 배내옷, 달떡, 서리, 소금, 백열전구, 수의 등 흰 것과 관련된 65개의 이야기가 ‘나’ ‘그녀’ ‘모든 흰’이라는 세 섹션 아래 펼쳐진다.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은 언니에 대한 이야기도 담고 있다. “그 언니에게 더 이상 더럽힐 수 없는 투명한 생명을 주고 싶었어요.” 작가는 “전작인 ‘소년이 온다’의 마지막 장면을 쓰면서 절대 더렵혀지지 않는 그 무엇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고, 그에 대한 답으로 쓴 소설”이라고 설명한다. 소설에는 현대미술 작가 차미혜씨의 ‘시적 풍경’ 같은 사진작품이 수록돼 있다. 문학과 미술의 콜라보레이션이다. 두 사람은 6월 3일부터 26일까지 서울 성북구 ‘오뉴월’에서 ‘소실점’이라는 2인전을 갖는다. 한강은 ‘배내옷’ 등 4편의 퍼포먼스를 영상에 담아 선보인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