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엘리엇 로저 사건’ 강남 살인이 남긴 과제

입력 2016-05-24 00:04

경찰이 ‘강남 화장실 살인사건’을 조현병 환자에 의한 ‘묻지마 살인’으로 결론 내렸지만 논란은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여성혐오(여혐)’ 논란이 촉발된 사회적 배경에 대한 성찰과 대책 마련이 한국 사회에 던져진 진짜 질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불안감 표출 이유는 구조적 차별의 문제=여성들은 이번 사건을 한 사람이 희생당한 사건이 아닌 사회 구조적 문제로 받아들였다. 강남역 등지에는 피해자를 추모하는 글과 함께 자신이 여성으로서 사회에서 느껴야 했던 차별과 불편한 시선, 불안감 등을 표출하는 목소리가 흘러넘쳤다. 지난 20일 한국여성민우회가 서울 신촌에서 개최한 ‘여성폭력 중단을 위한 필리버스터’에선 여성혐오 문화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회사원 이모(30·여)씨는 23일 “여성이 데이트폭력, 성폭력 등으로 피해를 입는 사건이 많이 발생하고, 방송이나 광고 등에서는 여성을 남성에게 의존하는 존재로 그리거나 ‘된장녀’ 등 여성을 비하하는 발언이 아무렇지도 않게 쓰이는 현실”이라며 “이번 사건을 계기로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남 살인사건과 비슷한 사건은 미국에서도 있었다. 2014년 5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대학도시 아일라비스타에서 젊은 여성을 포함해 6명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범인은 엘리엇 로저(Elliot Rodger·당시 22)였다. 그는 사건을 일으키기 전 유튜브에 “여자들은 나를 거부했다. 22살인데 여자와 키스해본 적도 없다. 금발의 여대생들을 죽이고 길거리 모든 사람을 죽이겠다”는 내용의 동영상을 올렸다. 로저의 범행과 동영상이 알려진 뒤 여성들은 트위터에 ‘예스 올 위민(Yesallwomen)’이란 해시태그를 붙인 글을 올려 일상생활에서 본인이 겪은 차별과 학대 등의 경험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처음 이 표현이 사용된 지 나흘 만에 이 해시태그를 단 글이 120만건 올라왔다.

사건이 일어난 후 안전 대책으로 공용화장실을 개선하는 등의 대책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차별적 구조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란 목소리가 나온다. 중앙대 사회학과 이나영 교수는 “여성들이 느끼는 불안, 공포는 성차별적 구조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성들은 물리적 폭력뿐 아니라 여성비하 발언 등을 일상적으로 겪고 있다”며 “차별문화를 전반적인 사회구조적 문제로 보고 정부는 구조를 바꾸려는 노력을, 국민은 인식을 바꾸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혐오발언·혐오범죄에 대한 문제의식 필요=이번 사건을 계기로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발언, 혐오범죄에 대한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지난해 개그맨 장동민이 과거 팟캐스트 방송에서 “여자들이 멍청해서 남자한테 안 된다” 등 여성혐오 발언을 해 논란이 됐다. 증오와 혐오의 의도까지는 없더라도 무의식중에 사회 소수자를 향한 차별적 언사를 하는 경우도 있다.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이윤호 교수는 “우리는 단일 언어권, 단일민족이다 보니 혐오나 증오라는 걸 크게 경험하지 못했고, 특별히 심각성을 못 느끼다가 이번에 터진 것”이라며 “여성혐오나 증오보다 사회 전반에 대한 증오범죄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졌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혐오발언이나 범죄의 대상은 보통 사회적 약자, 소수자다. 해외에는 혐오범죄를 막기 위해 관련법을 마련해둔 곳도 있다. 독일 형법 130조는 ‘국민 일부에 대한 혐오와 폭력을 조장하거나 모욕 및 악의적 명예훼손을 통해 인권을 치매할 경우 최소 3개월에서 최대 5년 징역형에 처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미국은 백인 우월주의자에 의한 흑인 살해와 동성애혐오주의자의 살인사건을 계기로 2009년 ‘혐오범죄예방법(Hate crimes prevention act)’을 만들었다.

법제정만이 문제 해결의 열쇠는 아니다. 숙명여대 법학과 홍성수 교수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증오범죄가중처벌법 도입 주장도 나오고 있다”며 “우리 국가와 공동체가 모든 차별과 적대를 몰아내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이지만 그 자체로만은 직접적 범죄예방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신중론을 폈다.

박은애 임주언 기자 limitles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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