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조심해야지” 강남 묻지마 살인에 위축된 남성들

입력 2016-05-23 00:08

“그러니깐 더 조심해야지.” ‘강남 묻지마 살인’ 사건을 두고 남자친구와 대화를 이어가던 유모(28·여)씨는 남자친구의 말 한마디에 화가 났다. ‘여성들이 범죄에 노출돼 있어 위험하다’는 인식은 같은데 해결책을 바라보는 생각은 달랐다. 남자친구는 ‘위험하니 조심하라’는 입장인 반면 유씨는 ‘치안 개선 등 제도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유씨가 “조심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지 않느냐”고 되묻자 남자친구는 “걱정해서 한 말인데 너무 과민반응을 보이는 게 아니냐”며 서운해 했다고 한다.

이번 사건을 두고 남성과 여성 사이에 미묘한 감정이 흐르고 있다. ‘여성 혐오’가 사건을 촉발시킨 ‘방아쇠’로 지적되면서 남성들은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말하기가 부담스럽다고 토로한다. 자칫 잘못하면 ‘여성 혐오’에 동조하는 사람으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학생 오모(24)씨는 지난 21일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에 이번 사건에 대한 생각을 적었다. 오씨는 “사건이 발생한 원인 중에서 여성 혐오가 우선인가, 아니면 정신병이 우선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쉽지 않다”면서 “하지만 우리는 둘 중 하나를 고르려고 안달이 났다”고 꼬집었다. 그는 “극단적인 의견들이 많아 공개적으로 글을 쓰는 게 조심스러웠다. 이번 사건이 소모적인 논쟁으로만 그칠까 걱정이 돼 용기 내서 글을 적었다”고 말했다.

직장인 최모(30)씨도 만난 지 2주 밖에 되지 않은 여자친구에게 이 사건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을 드러내기가 불안했다고 한다. 최씨는 “원인을 여성 혐오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여자친구가 나를 오해할까봐 솔직히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건이 ‘여성 혐오’를 둘러싼 성 대결구도나 소모적 논쟁으로 흘러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갈등을 조장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공정식 한국심리과학센터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22일 “자극적인 얘기들이 여과 없이 나오면서 극단적인 논리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며 “여성을 포함한 사회적 약자들의 불안을 줄이고 사회안전망을 정비할 수 있는 방안을 이성적으로 논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판 기자 p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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