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오후 5시33분 서울 서초구 강남역 10번 출구 옆에서 하얀 우비를 입은 두 명의 여성이 국화꽃을 양손으로 모아 잡고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낮 최고기온이 30도를 웃도는 더위가 계속되고 있었다. 뒤따르는 사람들도 흰색 우비를 입거나 흰색 마스크를 쓴 채 국화를 들거나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적은 A4에 들었다. 400여명(경찰추산)의 사람들이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의 피해자 A씨(23)를 추모하기 위한 행진을 시작했다. 여성이 대부분이었지만 남성들도 간간히 보였다.
이들은 강남역 일대를 50여분간 행진한 뒤 오후 6시22분쯤 살인사건이 벌어진 노래방 앞에서 추모의 뜻으로 3~4분간 묵념을 했다. 주최 측은 5분의 묵념시간을 계획했으나 예상보다 많은 인원이 찾아 계획보다 짧게 진행했다. 이들은 행진을 마친 뒤 강남역 10번 출구로 돌아와 희생자를 추모하는 뜻의 흰색과 빨간색이 섞인 리본을 달았다.
당초 집회를 주최한 ‘강남역 추모집회’에서는 100~200명 가량이 참여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실제 행진까지 참여한 인원은 경찰과 주최측 추산 400여명이었고,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서 추모의 뜻이 담긴 포스트잇을 보고 있었던 인원까지 합치면 900여명이 이날 거리로 나왔다.
이날 행사의 진행을 맡았던 김아영(26·여)씨는 행진을 앞두고 한 발언에서 “이 사건이 더욱 아픈 이유는 남 일 같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그날 내가 현장에 있었다면 피해자는 내가 될 수도 있었다”라며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성범죄와 살인의 대상이 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행사의 취지를 설명했다.
집회에 참석한 대학생 김은아(22·여)씨는 “오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나온 이유는 남성혐오를 하고자 함도, 싸우자고 나온 것도 아니다. 피해자를 추모하고자 나온 것”이라며 “왜 피해자가 번화가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생각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날 행진을 마친 뒤에는 자유발언의 시간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발언을 하려는 여성들에게 소리를 친 남성이나 반대의 뜻이 남긴 피켓을 든 이들이 대치를 벌이기도 했다. 언성이 높아지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대치는 대화의 수준에서 해결됐다. 행사가 시작되기 전인 오후 5시쯤 “증오는 추모의 방법이 될 수 없습니다” 등의 내용이 적힌 피켓을 든 남성들이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서 추모를 위해 찾은 이들과 대치하기도 했다.
한 남성은 “고인에 대한 추모를 위한 공간인데, 쪽지나 행진할 때 든 피켓 등에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몰거나 남성혐오적인 내용이 너무 많다”고 말했다. 이날 피켓을 들고 나왔던 남성은 “인터넷에서 본 ‘핑크 코끼리’ 인형 옷을 입은 남성이 옳은 말을 했는데도 집단에게 린치를 당한 것에 이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해서 나왔다”며 “오늘은 그런 일이 없었으면 하는 생각에서 나왔다”고 말했다.
반면 추모를 위해 나선 이들에게 무작정 ‘남성혐오를 하지말라’며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면 당연스럽게 반발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대치장면을 지켜보던 한 여성은 “상갓집에서는 일단 슬퍼하는 게 맞는 것 아니냐”며 “추모를 하고자 모인 이들에게 ‘당신들이 지금 하는 것은 남성혐오니 멈춰라’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환영하냐”고 말했다.
강남역에서 시작해 피해여성 추모는 전국으로 이어졌다. 이날 대전시청역 3번 출구, 대구지하철 중앙로역 출구 벽면 등도 추모 쪽지가 붙었다. 부산 주디스태화백화점 인근의 조형물에도 추모 쪽지가 붙고 있다.
홍석호 기자 will@kmib.co.kr
"남의 일 같지 않아서..." 강남역 추모 물결
입력 2016-05-21 2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