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창단 40주년 된 76극단을 이끌어 가고 있는 연출가 기국서 이름 앞에는 몇 가지 수식어가 붙는다. ‘기국서는 꼴통이다’, ‘기국서 자체가 부조리하다’, ‘관객모독의 기국서’, ‘햄릿의 기국서’ 등이다. 1976년에 창단공연으로 앙드레지드 작 <탕자 돌아오다·연출 김태원>을 올린 뒤 배우 기주봉과 창단 단원들은 소극장 연극 운동을 주도하고 실험연극을 생산하는 산파 역할을 했다.
연출가 기국서는 1979년에 오스트리아 작가 피터 한트게(Peter Handke)의 ‘관객모독’을 올리면서 실험적인 연극으로 관객을 직접 타격하는 ‘모독’과 욕설, 놀이, 물 뿌리기 등의 연극적 유희로 화제를 만들면서 스타연출가가 됐다. 70~80년대 시대의 역사성과 기국서 연출의 도발적인 연극 언어는 시대를 투영하는 역할을 했다. 운도 좋았다. 70년대는 한국연극이 기존 서구연극의 벗어나려는 움직임, 전통문화의 흡수, 소극장 운동 등 재현의 연극에서 비 재현으로 넘어가는 시대의 특징적 징후의 연극 현상들과 모방의 연극을 탈피하고자 하는 시기에 기국서는 40년 동안 묵묵히 자신의 소리를 지켜왔다. 80년대 기국서의 햄릿시리즈, 90년대는 <지피족>, <미친 리어>, <훼밀리 바케트> 2000년대 들어서는 <맥베드>, <용산, 의자들>, <개> 그리고 2012년에는 <햄릿, 삼양동 국화 앞에서> 등으로 문제작들을 선보여 온 그가 4년 만에 신작 ‘리어의 役’(작, 연출 기국서·4.20~5.8까지·대학로 선돌극장)으로 돌아왔다.
40년 리어를 연기한 노배우의 기억
무대는 자신의 이름으로 지어진 극장 건물로 노배우가 살아가는 지하는 삶의 공간이다. 그가 살아가는 유일한 삶의 흔적들이다. 책장, 턴 테이블, CD음향기기와 CD 박스와 작은 탁자에는 돋보기와 책과 노트, 파이프 등이 보인다. 무대 정면 뒤쪽으로는 계단으로 형성된 출입구로 등퇴장 공간이다.
윗층 극장에서는 그의 막내 딸(황보란 분)과 사위(김태라 분)가 ‘리어’를 공연 중인 것으로 설정된다. 40년을 리어의 역으로 살아온 극중 인물 노배우(홍원기 분)는 치매환자다.
40년 동안 리어로 살아온 노배우는 노쇠해진 기억과 삶의 혼돈으로 현실의 삶과 역(役)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과 마찬가지로 세 딸을 등장시키고 광대(김왕근 분)는 노배우의 꺼져가는 기억을 환기 시키며, 죽음으로 소멸되어가는 삶과 욕망의 끈을 연결한다.
리어로 살아온 노배우의 삶의 환영은 딸들에게 버림받고 광야로 내몰려져 씁쓸한 죽음으로 최후를 맞이한 리어와 삶과 동일시된다. 극중 인물로 살았던 리어의 삶과 중첩되고, 리어왕의 대사는 그의 삶이고 언어다. 현실의 삶도 리어로 존재하는 노배우는 “그런데 지금 뭐지? 나는 뭐지? 리어왕도 아니고 나 자신은 누군지 모르겠고. 나는 지금 무엇으로 살아가는 건가? 나는 누구냐?”라고 말을 한다. ‘나’라는 실존에서 극중 인물 ‘너’ 라는 경계에 서서 주어진 역할을 연기(演技)하는 배우의 실존의 삶보다는 역할을 수행한 리어의 삶이다. 꺼져가는 치매의 기억에 존재하는 내면은 리어와 광기이며, 딸들에게 버림받고 죽음으로 내몰린 리어의 최후는 오늘날 자식과 가족이 외면하는 씁쓸한 현실풍경이다.
무대 첫 장면은 리어왕의 3막 2장으로 리어가 황야를 가로지는 장면을 연기하는 노배우(홍원기 분)다. 치매에 걸린 노배우지만 삶의 욕망은 강렬하고 파편으로 흩어진 기억은 또렷하다. 홍원기는 25분 정도를 모노드라마 형식으로 극중 장면을 끌고 간다. 리어왕을 연기했던 체험적 배우의 연기, 리어의 극중 장면의 기억의 환영들과 리어왕의 대사를 인용하면서 연출은 정치적 현실성을 담아낸다. 그가 바라보는 궁궐은 더 화려해 지고, 비람은 더 차가워진 현실이며, 피 비린내가 심해진 사회다. 공연 중간에 연출은 암전을 시키고 아직 치유되지 못한 사회현상들과 정치를 풍자시키면서 웃음으로 몰아넣는다. 배우들의 안정된 연기는 ‘리어의 役’을 감상하는 또 다른 맛이다.
여전히 플롯의 극적 구조와 사건의 논리와 개연성에 의존하지 않은 채 시대풍경을 갑작스럽게 투영하려는 기국서 연출의 실험적 객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기국서 연출의 ‘리어의 役’은 6월1일부터 5일까지 게릴라극장에서 이어진다. 이어서는 76극단 출신의 박근형, 김낙형 연출가가 76극단 40주년 기념공연으로 '죽이 되든, 밥이 되든'은 5월18일~29일, ‘붉은 매미'는 6월8일~12일 각각 게릴라극장에서 공연한다.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공연예술평론가)
[김건표 교수 연극이야기] 38. ‘리어’를 40년 연기한 배우의 삶을 그린 ‘리어의 役’
입력 2016-05-19 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