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 구자범이 서울국제음악제를 통해 3년 만에 공식 복귀할 예정이었지만 예술감독 류재준과의 갈등으로 무산됐다.
류재준은 16일 오후 ‘구자범 잠적하다’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언론에 배포했다. 구자범이 지난 14일 첫 리허설 이후 연주회 탈퇴 의사를 보인 후 15일 연습에 불참한 것은 물론 현재까지 잠적 중이라 지휘자를 긴급히 교체하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류재준은 해당 글을 자신의 페이스북에도 올렸다. 그리고 구자범의 잠적 소식은 바로 기사화 됐고, 클래식계 안팎에서 배경을 놓고 설왕설래가 오갔다.
구자범은 원래 28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서울국제음악제 오케스트라와 함께 류재준이 작곡한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두 대의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판타지’를 일리야 그린골츠와 백주영의 협연으로 초연할 예정이었다. 이와 함께 100명이 넘는 대규모 편성인 루에드 랑고르의 교향곡 1번 ‘벼랑의 목가’도 연주될 예정이었다. 서울국제음악제는 구자범 대신 폴란드 지휘자 피오트르 보르코프스키에게 무대를 맡기는 한편 랑고르 교향곡 1번 대신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5번을 올린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몇 시간 뒤 구자범의 조수라고 밝힌 측근이 잠적 논란에 대한 반박글을 류재준의 페이스북에 올리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류재준이 구자범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 지휘를 하지 말라고 했으며 이 내용은 스피커폰을 통해 여러 사람이 함께 들었다는 것이다. 이후 류재준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렸던 ‘구자범 잠적하다’는 제목의 글을 내렸다.
이와 관련해 류재준은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내가 먼저 구자범에게 연락한 것은 맞다. 구자범이 사람들 앞에서 내가 쓴 작품을 모욕했기 때문이었다”며 “나는 얼마전 밝힌 것처럼 이번 음악제를 끝으로 작곡가에서 은퇴할 예정이다. 이 곡은 내 마지막 곡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컸던 만큼 구자범의 말에 큰 상처를 입었다. 그래서 구자범에게 내 곡을 신뢰하지 못하면 연주하지 말라고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다음날 구자범에게 수백 번이나 연락을 했고, 사과의 메시지도 보냈다. 하지만 어떤 답도 받지 못한 상황에서 지난해 구자범이 내 작품의 프랑스 공연 지휘를 약속했다가 펑크냈던 게 생각났다. 그래서 이런 일이 또다시 일어날까 우려돼 급히 대체 지휘자를 구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구자범은 “류재준과 곡에 대해서 작곡가와 지휘자로서 일상적인 협의를 했을 뿐이다. 이후 류재준이 내게 곡을 맡길 수 없다고 먼저 연락한 것은 당시 여러 사람이 함께 들었다. 내가 개런티도 받지 않고 도와주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말을 듣고 지휘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도 내가 잠적했다는 보도자료를 돌렸다는 것에 대해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류재준이 사과 메시지를 보낸 뒤 나도 마음을 추스르고 있었다. 공연까지 1주일 이상 남아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연습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그런데, 류재준이 자신의 행동은 감춘 채 내가 모든 잘못을 했다는 식으로 몰고 갔다. 내 대신 대체 지휘자를 새로 구했다면 내부사정 때문에 부득이 바뀌었다고 발표할 수 있지만 어떻게 내가 잠적해서라고 말할 수 있나”며 화를 삭이지 못했다. 그는 또 언론에 대해서도 “왜 내게 직접 사실을 확인하지 않았느냐”며 섭섭함을 드러냈다.
한편 류재준은 페이스북에 이번 사태에 대한 사과의 글을 올렸다. 그는 “구자범과의 문제는 어찌 보면 내 자존심과 경솔함, 유치함 때문에 불거진 일이다. 이번 연주는 구자범에게 내가 도움을 청해서 이뤄진 것이었다. 페이스북에 ‘구자범 잠적하다’라고 쓴 것은 날 도와주기 위해 온 사람을 혐훼하는 행동이었다”며 “구자범은 물론 연주자들에게도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류재준의 사과로 이번 논란은 일단락 됐지만 서울국제음악제는 클래식 팬들의 신뢰를 상당 부분 잃게 됐다. 28일 공연도 상처만 남은 상황에서 제대로 올라갈 수 있을지 우려된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
구자범의 잠적 논란부터 류재준의 사과까지, 서울국제음악제 타격
입력 2016-05-17 01:09 수정 2016-05-17 1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