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백전노장 쿠니무라 준(61)이 혹독한 한국영화 신고식을 치렀다. 연기경력 35년, 출연작 80여편에 달하는 베테랑에게도 나홍진 감독 현장은 녹록치 않았다. 그럼에도 영화 ‘곡성’이 그에게 남긴 건 ‘행복감’이라고 했다.
곡성은 쿠니무라 준이 처음 출연한 한국영화다. 극 중 그는 의문의 연쇄 사건이 벌어지는 마을에 찾아든 정체불명의 외지인으로 등장한다. 대사는 많지 않지만 눈빛만으로 모든 걸 표현했다. 극 초반부터 맨 마지막까지 관객의 숨통을 틀어쥐는 장본인이다.
그 강렬한 이미지를 떨쳐내지 못한 채 지난 11일 서울 중구 소공로 더 플라자 호텔에서 그를 만났다. 인터뷰 테이블에 마주앉았을 때까지 얼어있었다. “좋은 영화가 완성된 것 같아 기쁩니다.” 그가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입을 열었을 때 비로소 긴장이 풀렸다.
캐스팅 제안을 받기 전까지는 나홍진 감독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는 쿠니무라 준은 “일단 시나리오가 굉장히 좋았다”며 “이후 감독이 직접 일본에 찾아와 이야기를 나눴는데 잘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출연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고생문이 열렸다고. 고라니를 생으로 뜯어먹는 신부터 산 속을 뛰어다니는 장면까지 직접 소화해야 했다. 고관절 통증을 앓고 있는 그로써는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었다.
“제일 힘들었던 건 고라니를 먹는 촬영이었어요. 실제로 육회를 먹으면서 찍었는데 감독님한테 더 이상 못 먹겠다고,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말했을 정도예요. 그만큼 여러 번이나 테이크를 돌렸다는 얘기죠(웃음). 또 폭포물을 맞는 장면이 있었는데, 산에 오르는 게 너무 힘들더라고요. 제가 왼쪽 고관절이 안 좋아서 자꾸 통증이 느껴져 어려움이 있었죠.”
더구나 뛰는 장면이 많았다. 평지도 아닌 가파른 살 길을 냅다 구르고 뛰길 반복했다. 쿠니무라 준은 “감독님이 괜찮으냐고 걱정은 해줬지만 촬영 시작하면 얄짤없었다. 계속 한 번 더 가자고 했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도 “감독은 원래 그래야 하는 직업(이니 이해한다)”며 웃었다.
쿠니무라 준은 미국·중국·홍콩·프랑스 등 다양한 국적 영화인들과 작업을 한 경험이 있다. 할리우드 영화 ‘킬 빌’(2003)에도 출연했다. 그런 그가 한국 스태프들과의 촬영에서는 어떤 차이를 느꼈을까.
“크게 보면 시스템 자체는 다르지 않습니다.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한국은 감독이 많은 걸 컨트롤하는 힘을 갖고 있더군요. 일본을 포함해서 다른 나라들은 파트별로 상의해서 어떻게 할 건지 결정하는 경우가 많아요. 나홍진 감독 현장은 감독이 모든 책임을 다 안고 일일이 결정해나가는 것 같았어요. 각각의 방법에는 긍정적인 면도, 부정적인 면도 있겠지요.”
쿠니무라 준은 특히 황정민·곽도원·천우희 등 배우들과 호흡을 맞춘 데 대해 만족감을 드러냈다. 그는 “좋은 배우들과 연기를 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며 “내 자신에게도 좋은 자극이 됐다. 쾌감 같은 것도 느꼈다”고 전했다.
“한국배우들은 현장에 올 때 동기부여가 명확하게 돼있는 것 같더군요. 연기에 대한 열정도 엄청나고요. (내면에) 아주 뜨거운 걸 갖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격한 감정연기만이 아니라 감정을 가라앉힌 상태의 눈빛연기만 봐도 그래요. 그 안에 담긴 에너지가 크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죠.”
곡성을 통해 얻은 점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관객의 입장에서 ‘한국영화는 왜 이렇게 강한 파워를 갖고 있을까’ 생각했었는데 이번 촬영을 통해 그런 의문이 해결된 것 같다”는 답이 돌아왔다.
“어느 현장이든 힘들긴 마찬가지예요(웃음). 나홍진 감독과 일하면서 그의 재능을 몸소 느낄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한국배우들과 같이 호흡할 수 있어서도 정말 좋았고요.”
한국 작품에서 다시 만날 가능성은 얼마든지 열려있다. 제안이 들어오면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약속했다. 혹시 다음 작품에서 만나고 싶은 배우가 있느냐고 물으니 그의 입에선 두 배우의 이름이 나왔다.
“꽤 오래 전 영화인데, 안성기씨가 출연한 작품을 TV에서 우연히 본 적이 있어요. ‘저런 배우가 있다니’ 정말 놀라웠죠. 그 작품 이후로 한국영화를 의식하게 됐어요. 송강호씨는 ‘살인의 추억’에서 보고 깊은 인상이 남았습니다. 한국영화는 파워풀한 힘이 있는 것 같아요. 굉장하다고 생각합니다.”
쿠니무라 준은 역할 크기에 상관없이 작품을 고르기로 유명하다. 주·조연이든 단역이든 가리지 않는다. 작품을 찍으면서 느끼는 즐거움, 그것 하나를 좇는다. 이는 그가 부지런히 다작(多作)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기도 했다.
“주연이든 조연이든 상관없어요. 다 같이 작품을 만들어 나간다는 재미가 큰 것 같아요. 그런 작업을 굉장히 좋아하고, 즐기고 있습니다.”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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