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해태는 그 해태가 아닙니다

입력 2016-05-14 00:13

이 해태가 그 해태가 아니다?

‘허니버터칩’의 해태제과식품이 이번주 상장되자마자 3일 연속 상한가를 기록했다. 언론들도 “15년만에 증시로 돌아온 해태제과가 꿀맛을 보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런데, 막상 해태제과식품은 “우리는 그 해태제과가 아니다”라고 해명하고 있다.

해태제과식품은 2001년 스위스계 UBS컨소시엄이 옛 해태제과의 제과사업부문만 사들인 뒤 크라운제과에 매각해 지금까지 왔다. 이 과정에서 옛 해태제과는 상장이 폐지됐고, 우여곡절 끝에 완전히 문을 닫은 상태다.

아, 해태의 추억

옛 해태제과는 외환위기 때 해체된 해태그룹의 중추였다. 추억의 해태 타이거즈를 다들 기억하겠지만, 해태건설 해태상사 인켈오디오 심지어 해태텔레콤과 해태중공업도 있었다. 미국 일본 사우디아라비아까지 진출한 중견대기업이었던 해태그룹은 그러나 무리한 사세확장 과정에서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았다. 결국 해태제과가 법정관리까지 가는 수모를 겪으며 뿔뿔이 팔려가고 해체됐다.

주인은 바뀌었어도 입맛은 바뀌지 않았다. 제과업계의 경쟁상대였던 크라운제과에 팔려간 해태제과는 ‘해태’라는 브랜드를 계속 지켰다. 브라보콘, 사브레, 에이스, 홈런볼 같은 왕년의 히트상품들은 지금도 팔리고 있다. 회사가 필리고 직원들도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추억의 먹거리들은 여전히 지금의 해태를 옛날의 해태로 기억하게 했다. 윤영달 크라운·해태제과 회장도 홈페이지 인삿말에서 “1945년 창립돼 70여년 국민과 우애를 다져왔다”고 회사를 소개하고 있다.

“상표는 팔아도 역사는 안 팔았다”

문제는 이젠 법적인 실체도 찾기 힘든 옛 해태제과의 소액주주들도 이런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다. 해태제과 주주모임의 송인웅씨는 “해태라는 상표권, 부라보콘 같은 상품 이름, 과자를 만들던 생산시설은 팔았지만 해태제과라는 이름과 해방둥이로 시작한 기업의 역사는 팔지 않았다”며 “UBS컨소시엄 때부터 지금의 크라운해태에까지 이런 점을 항의했지만 아무런 답도 하지 않으면서 무시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옛 해태제과는 제과사업 부문을 스위스계 UBS컨소시엄에 넘긴 뒤에도 건설부문 등을 중심으로 남아 있었다. 이 과정에서 옛 해태제과의 남은 빚을 가지고 있던 은행들이 출자전환을 한 뒤 주식을 팔아버린게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송인웅씨도 이때 해태제과의 주식을 2000원 안팎에 사들였다. 상장이 폐지된다는 소식에 ‘해태제과’라는 이름과 그 유명한 해태 동상이 그려진 주식 현물(서류)을 받아서 지금까지 고이 간직하고 있다.

해태제과가 다시 부활할 날을 꿈꾸며 주식을 가지고 있던 이들이 한때는 2만3000명까지 되었다. 지금도 150만주를 가진 27명의 주주들은 “해태제과란 상호와 1945년 설립한 해태제과의 역사와 연혁을 무단 사용하는 해태제과식품과 이를 방조한 한국거래소 때문에 우리들 해태제과 주주들은 알거지가 되었다”며 “상호·역사·연혁을 사용하려면 그 몫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해태제과식품이 다시 상장을 추진하다는 소식에, 옛 해태제과 주주 전모 씨 등 20명이 자신들은 다시 자신들의 옛 주식도 신주로 교환해달라며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들은 지난 4일에 양화대교에 올라가 자신들의 권리를 보장하라고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서울 용산구 해태제과식품 본사 앞이나 거래소에서도 계속 재상장이 일방적이었다는 항의를 하며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구조조정에 당한 소액주주들

옛 해태제과는 그 뒤 회사 이름을 하이콘테크로 바꾸고 회생을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하이콘테크의 주식은 최근까지도 장외에서 거래돼 왔지만, 지금은 청산절차를 밟고 있어 사실상 휴짓조각이나 마찬가지다.

빚을 주식으로 맞바꾸는 출자전환은 구조조정 과정에서 흔히 있는 일인데, 이 주식을 들고 있던 은행들이 막판에 개미투자자들에게 이를 팔아치운 뒤 회사가 청산 절차에 들어간 것이다. 일부 투자자들은 이미 해태제과의 제과 사업이 따로 분리되었다는 점을 알지 못하고 “하이콘테크가 해태제과”라는 꾐에 속아 주식을 산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옛 해태제과가 제과사업을 매각하기 전에 회사의 실물주식을 가지고 있던 주주들도 있다. 이들은 제과사업 부분에도 지분이 포함돼 있었으니 새로운 해태제과식품에도 자신들이 주주로서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소송까지 제기했으나 패소당했다. 매각 결정이 법정관리 상황에서 이뤄졌고, 법정관리에 들어간 기업에선 주주들의 권리가 상실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해태제과식품은 상장을 하면서 ‘해태제과’라는 간편한 명칭 대신 굳이 ‘해태제과식품’이라고 꼬리를 붙여야 했다. 지금의 해태는 옛날의 그 해태가 아니라는 명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구조조정이란 이름으로 이뤄지는 금융거래는 돈과 주식과 채권이 복잡하게 오간다. 그 과정에서 주주명부도 사라졌고, 회사는 간판 조차 남지 않고 서류상의 법인 명칭만 남은 허깨비가 되었다. 소액주주들은 이런 과정을 설명 듣거나 통보도 받지 못했다. 해태의 추억을 믿고 주식을 산 순진한 투자자들에게 남은 것은 휴지로도 쓸 수 없는 주식 종잇장과 “혹시나 하고 주식을 사들인 투기꾼들”이라는 낙인 뿐이다.

되풀이되는 혼란

해태그룹을 해체로 몰고 간 외환위기가 일어난지 벌써 햇수로 20년째다. 옛 해태제과의 주주들과 지금의 해태제과식품 간 갈등은 결국 그런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일이다.

지금 다시 한국에선 구조조정이란 말이 전면에 등장했다. 외환위기 때처럼 한국 경제 전체가 결단 날 것 같은 위기는 아니지만, 수만명씩 고용하고 관련 산업도 덩치가 큰 분야에서 채권단의 자율협약이니 워크아웃이니 법정관리니 빅딜이니 회자되고 있다.

이번에도 작은 사람들의 권리는 무시당하고 있다. 나랏돈을 끌어쓰며 적자를 숨겨온 경영진들은 수십억원의 성과급을 챙기고 떠났다. 대기업 회장들도 경영권을 포기한다며 짐짓 뒤로 물러섰지만, 수천억 재산 중 일부가 줄었을 뿐 자신들의 생계가 위협당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몇십억원이라도 챙기겠다는 듯 막판에 주식을 팔아치운 전임 경영진도 있다. 낙하산을 경영진으로 보내며 ‘부당이익’을 공유한 산업은행, 수출입은행이나 이들을 조종한 경제관료들도 자기 뱃속을 채울 때는 언제고 이제는 책임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다.

반면 용접하고 협상하고 수주하며 열심히 일해온 직원들은 당장 생존이 어려워졌다. 정규직 직원보다 더 많았던 하청업체 직원들은 이미 현장에서 사라지고 있다. 조선·해운 업계의 채권은 서민금융기관인 지역농협이나 새마을금고 같은 곳에서 적지 않게 사들였다. 채권단 협상이 시작되면 이들 서민금융기관도 타격을 받게 된다.

구조조정의 논리나 금융의 논리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작은 사람들의 권리나 생존권은 무시당하는 것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위기는 극복되었던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떠넘겨지고 가려지고 유예되어왔던 것 뿐이었다.

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