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표 교수 연극이야기] 37.이윤택 연출, 30년 농사로 피어난 ‘벚꽃동산’

입력 2016-05-09 09:11
연희단거리패가 30주년으로 선택한 작품이 안톤 체홉의 ‘벚꽃동산’이다.

이윤택 연출은 86년에 이 극단을 창단해 30년 동안 해체와 재구성을 통한 파격과 실험으로 전통과 현대를 융합하면서 고집스럽게 한국연극의 토지를 개간하고 거름을 주면서 풍성한 연극농사를 지어왔다.

밀양연극촌으로 내려가서도 공동체 정신으로 무장하고 이윤택 연출과 흔들림 없이 연극 토양을 개간하고 다품종의 연극 씨앗을 뿌려온 연희단거리패 단원들은 이번에 120석 규모의 게릴라 극장에서 수확한 안톤 체홉의 ‘벚꽃동산’을 소극장 연극으로는 가장 강렬한 ‘벚꽃동산’으로 개간(開墾)을 했다.



무대는 경사공간으로 확장해 시각의 입체감을 높이고 회전형 무대로 4막을 구성하면서 ‘벚꽃동산’을 회전시키고 웃음으로 속도를 유지하니 체홉 연극이 활력으로 넘쳐난다.

연희단거리패 배우들은 탄력 있는 연기로 사실주의적 삶의 풍경으로 내면성을 유지시키면서도 체홉 벚꽃에 가려지고 물 들여져 있는 인간내면과 삶의 욕망을 희비극적으로 쏟아낸다.



5년 만에 프랑스 파리에서 영지 벚꽃동산으로 돌아온 여 지주 라네프스카야의 삶의 욕망은 과거로 박제되어 있다. 로빠힌(윤정섭 분)은 빛 더미로 벚꽃동산이 경매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시장의 논리로 벚꽃동산과 강가의 토지를 별장으로 활용해 수입을 올리자는 제안을 하지만 라네프스카야에게 오래된 집을 철거하고 벚나무들을 잘라버린다는 것은 삶의 욕망을 거세하는 두려움이다. 두려울수록 인간의 삶은 기억으로 재생되고 욕망은 집착된다.



전 남편과 강물에 빠져 죽은 아들의 죽음은 기억으로만 존재되고 삶의 욕망과 미래는 어린시절의 기억으로만 환기될 뿐이다. 배우 김소희는 1막에서 남편과 아들의 죽음, 과거 어린 시절의 기억, 불행한 삶의 내면을 꺼내는 장면에서 희비극성의 감정을 강렬하게 쏟아내고 극의 균형을 탄탄하게 잡아낸다.



4막에서 몰락한 벚꽃동산의 영지는 파괴된 동산의 도시로 폐허를 만들고 마지막 남은 한 사람의 삶을 죽음의 땅으로 소멸시킨다.

연출은 마지막 장면에서 삶의 몰락, 기억으로만 환기되고 멈추어 버린 벚꽃동산의 폐허를 강렬한 소리로 청각을 깨우며 벚꽃동산 영지를 평생 지켜온 87살의 늙은 하인 피르스(홍민수)를 무대로 휘날리는 벚꽃더미로 죽음을 품게 만든다.

벚꽃으로 덥혀진 소멸의 영토는 네프스까야(김소희 분)의 기억으로만 살아 있는 동산이다. 소멸은 새로운 삶의 잉태다. 연출은 로파힌과 몰락한 지주를 소통과 화합으로 묶어 기차로 탑승시킨 채 이들이 함께 살아갈 희망의 도시로 떠나보낸다.



극중 인물 ‘로파힌’은 30년 전 부산 변방에서 가마골 소극장을 세우고 전투적인 게릴라 정신으로 무장해 한국연극을 점령하고 대표적인 연출가가 된 연희단거리패 이윤택 예술감독의 체온이다.



삶의 낙천성을 드러내는 가예프(박일규 분)은 체홉식의 내면성을 유지하고, 현실사회를 투영하지 못하는 죽은 지식인 폐차(오동식 분)는 다락방에서 고립되어 살아가는 지식인으로 극의 균형감을 높인다. 배우 윤정섭은 무대 전체를 읽어내는 완숙함을 드러낸다. 에피호도프(조승희 분)은 극을 웃음으로 좁혀내고 있다. 5월15일까지 게릴라극장에서 공연된다. 꼭 볼만한 연극이다. ★★★★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공연예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