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를 과거에 선물하는 발굴작가 이영섭 ‘시간을 머금은 순수’ 갤러리마리 개인전

입력 2016-05-08 17:10
조각가 이영섭(53)의 신작 ‘어린왕자’를 보면 고대에서 끄집어낸 동화 같다. 돌조각이기는 한데 곳곳에 유리나 도자기 파편이 박혀 있다. 얼굴에는 흙까지 묻어있다. 땅 속에서 금방 꺼낸 유물처럼 보인다. 작가의 작업은 독특하다. 돌을 깨거나 깎아내지 않는다. 만들고 싶은 형상을 땅에 드로잉처럼 그린 다음 흙을 파낸 구덩이에 시멘트와 오브제를 넣는다. 굳어지기를 기다린 다음 발굴하듯 꺼내 흙을 툴툴 털어내면 작품이 완성된다.

땅을 거푸집 삼아 발굴 현장에서 유물을 꺼내는 작업은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물다. 그는 강원대 사범대를 졸업하고 미술교사로 발령이 났으나 3주 만에 그만두었다.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서기 위해서다. 자신만의 작업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1998년 고향인 경기도 여주 고달사지 근처에서 유물 발굴 현장을 우연히 지켜보면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처음에는 테라코타로 형상을 빚었다. 매끈하게 잘 나왔다. 그런데 잘 만드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창조라는 게 잘 만드는 게 아니라 새로운 걸 개척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잘 만든 조각도 결국에는 깨질 텐데. 오래된 도자기 파편들을 활용한다면 과거와 현재를 잇는 전달자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체의 경우 눈은 흙에서 꺼낸 다음에 새긴다. 그는 왜 돌을 쪼거나 나무를 깎는 전통 조각의 기법을 하지 않는 것일까. 아버지가 목수여서 어릴 때부터 형태를 빚는 데는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나 르네상스 시대 조각가보다 잘 만들 수는 없었다. 지금은 3D 프린터까지 나왔는데 잘 만드는 게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작품이 제대로 나오기까지 숱한 시행착오를 겪었다. “거푸집이 무너지거나 작품 형태가 의도한 대로 나오지 않아 애를 먹었죠. 마음에 들지 않아 깨버린 것도 부지기수고요. 혼합재료의 정확한 비율을 찾는 데만 20년 넘게 걸렸습니다.” 그는 피카소가 어린아이처럼 그리는데 50년 세월이 걸린 것처럼 자신을 내려놓고 진심과 열정을 다해 작업했다고 털어놨다.

이렇게 만든 작품을 서울 종로구 신문로 성곡미술관 앞에 있는 갤러리마리에서 6월 15일까지 선보인다.‘시간을 머금은 순수’라는 타이틀로 어린왕자, 노트북,모자상, 의자, 곰인형, 불이 들어오는 성경책 등 38점을 내놓았다. 작품마다 18세기 조선시대 분청이나 백자 파편을 넣어 한국의 미를 살렸다.인체를 꽉 채우지 않고 여백을 둔 것은 관람객들이 상상으로 채워 넣으라는 의미다.

과거와 현대의 소통이 느껴지는 동시에 투박한 듯하면서도 세련된 한국적인 미가 돋보인다. 작가는 “계속 이어지는 전시회로 작품이 모자라 눈만 뜨면 작업을 했다”고 한다. 전국을 떠돌며 몸으로 체험했던 그토록 탐구해왔던 한국 조각의 특징이 그대로 녹아 있다. 한국의 미가 이제 완성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시간성은 그래서 그의 조각을 이해하는 데 키워드가 된다. 그는 발굴 현장의 시간성이 바로 예술이란 생각이 들었다. 7년이란 시간을 그렇게 지켜보기만 했다. 명문이 새겨진 조각 난 기왓장들을 시간 속에 담아두고 싶었다. 돌조각의 한계를 깨는 그는 조각의 본고장 이탈리아에 작업실을 두고 서구 예술가와 정면대결을 벌일 계획이다.

그가 세상의 시끄러움을 멀리하고 오로지 경기도 양평 작업실에 파묻혀 작업에만 몰두해왔던 이영섭 작가의 장인정신이 기대된다. 갤러리 마리의 정마리 대표는 “이영섭 작가는 우리에게 추억이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매력이 있다”며 “이번 전시회를 통해 이 작가의 발굴 작업과 작품이 더 많은 대중들에게 알려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출판사 건물을 리모델링한 갤러리마리의 1층에는 카페와 야외 정원이 있고 2층과 3층은 전시장이 있다.곳곳에 들어선 작품들은 아득한 시절로의 여행을 안내한다.작가는 “문화재 발굴이 과거의 시간을 현재로 꺼내는 것이라면 내 작업은 현재의 시간을 과거로 돌려보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02-730-7300).

이광형 문화전문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