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너 나형렬(53) 교수를 지난 26일 서울시 송파구 신천동에 위치한 롯데백화점 에비뉴엘 월드타워점 사파이어 라운지에서 만났다. 그는 현재 백석예술대학교와 우석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나 교수는 “95년도 2월에 파리에 도착했는데 고난의 시작이었다”며 “97년도에 IMF가 터졌는데 98년도에 첫째 아이가 나왔다. 경제적으로 힘들었고 장모님이 쌀을 가지고 오셔서 아내가 출산을 했다”고 회상했다.
경제적으로, 집안의 가장으로서도 부담이 있던 상황에서 더욱 그를 힘들게 했던 것은 학교 문제였다. “나이가 들어서 유학을 가다보니까 사립학교를 가야했는데 반주자가 반주를 너무 못해서 학교 측에 이야기했고 다른 학생을 쓰게 됐습니다. 근데 제 담당 선생님이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화를 내셨고 그때부터 저를 탐탁지 않게 보시면서 졸업 시험을 3,4년 동안 계속 떨어뜨렸어요. 결국 사립음악원을 나와서 다른 학교로 옮겼고 몇 년이 허비됐어요.”
학교 문제로 좌절을 겪으면서 공황장애가 찾아왔다. 머리가 어지럽고 땅이 올라오는 듯하고 건물이 쏟아져 내리는 듯했다고. 스트레스로 소화도 잘 시키지 못 해 몸무게가 10㎏ 정도 빠졌다.
절망의 상황 속에서 돕는 이를 만났다. 나 교수는 “제 피아노는 도저히 쓸 수 없는 상태였다”며 “엘리베이터 안에서 할아버지한테 인사를 하고 하소연을 했던 거 같은데 할아버지가 자기 집에 피아노가 있다고 쓰라고 했다. 할아버지가 열쇠를 주셨고 얼떨떨했지만 다른 대안이 없었던 터라 할아버지 집에 가서 피아노 연습을 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할아버지 혼자 사는데 낮에는 일을 하러 가셨다”며 “통계청에 다니는데 자기가 없을 때 언제든 와서 쓰라고 했다. 피아노를 치며 그 방에서 노래 연습을 많이 했다. 혼자 사는 할아버지 집이다보니 먼지가 쌓여서 집을 치웠는데 어느 날 테이블 위에 50유로가 있었다. 그런가보다 했는데 다음에 할아버지가 왜 돈을 안 가져갔냐고 청소해줘서 고마워서 놓은 돈이라고 했다. 나는 오히려 내가 돈을 내고 피아노를 써야할 상황에 말도 안 된다고 했지만 할아버지는 정기적으로 봉투에 돈을 넣어 피아노 위에 올려주셨다. 그렇게 할아버지 집에서 피아노를 치고 청소한 대가로 용돈도 받으면서 지냈다”고 덧붙였다.
나 교수는 프랑스 할아버지를 하나님이 보내주신 천사라고 했다. 공황장애로 몸도 마음도 피폐해져 있을 때 할아버지의 방에서 노래 연습을 하고 용돈으로 아이들에게 분유 값을 댈 수 있었다. 나 교수 가족은 지금도 할아버지에게 연락을 하며 가족처럼 지내고 있다.
나 교수에게 두 번째 귀인은 서울예고 선배인 김명숙이었다. 그는 “서울예고, 서울대를 졸업하고 베를린 콩쿠르에서 1등을 하기도한 선배인데 파리의 한 음악원에서 선생님을 하고 있었다”며 “보통 한국 유학생들은 한국 선생님한테 레슨을 안 받으려는 경향이 있는데 저는 선생님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공황장애가 있는 상태에서 파리 국제 음악원에서 수석졸업을 할 수 있었고 연수사 과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파리 레오폴드 발랑 국제콩쿨에서 성악부분 1등도 가능했다”고 전했다.
나 교수는 유학 당시에 받은 것들을 한국의 학생들에게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는 “돌이켜 보면 할아버지는 저를 계속 도와주고 싶었는데 제 자존심이 상할까봐 여러 가지 고민 끝에 청소를 한 돈으로 주셨던 것 같다”며 “요즘 학생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들이 많다. 저도 할아버지처럼 아이들에게 상처가 안 되게 도와주고 싶다. 나도 할아버지에게 그렇게 배웠으니까”라고 말했다.
나 교수와 함께 인터뷰에 자리했던 아내 정진주씨(백석예술대학 디자인학과 교수)는 “집에 뭘 사두면 학생들 주려고 자꾸 가져간다”고 했다.
나 교수는 “애들이 공부할 시간이 없다”며 “수업 듣고는 등록금 때문에 바로 아르바이트를 하러 간다. 아르바이트 때문에 수업을 빼먹는 학생들이 많다. 많이 안타깝다”고 전했다. “제가 프랑스에서 학업을 무사히 마친 것처럼 학생들의 형편과 상황을 고려해서 그 아이들도 학업을 잘 마치기를 기도하고 도울 뿐”이라고 덧붙였다.
조경이 기자 rooker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