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곳곳에 토사물” 취객 피해 등교하는 초등학생들

입력 2016-05-04 17:30

날이 밝아도 거리의 ‘취기’는 그대로였다. 비가 내리는 지난 3일 오전 8시30분쯤 서울 강남구 논현동 ‘먹자골목’에는 간밤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 있었다. ‘24시간 영업’ 표시가 붙은 고기집 앞에 20대 남녀가 쭈그려 앉아 담배를 피웠다. 담배 연기는 고스란히 길을 지나는 이들에게 퍼졌다. 곁을 지나던 엄마는 책가방을 맨 딸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 골목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논현초등학교가 있다.

논현초를 중심으로 인근 200m 안에 술을 파는 음식점만 50곳이 넘는다. 취객 사이로 아이들이 위태롭게 등교하는 모습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 4일 등굣길에 만난 학부모 현모(39·여)씨는 “이 동네는 위험해서 대부분 학부모가 꼭 아이와 함께 등교를 해야 한다”며 “골목에 술 취한 사람도 많고 이들을 태워가려는 택시도 줄줄이 서있다. 아이를 등교시키면서 술 취한 사람들을 자주 보는 편”이라고 말했다.

서울 서초구 이수초등학교도 사정이 비슷하다. 이수초 근처에는 술집과 노래방, 마사지 업소가 줄지어 있다. 가게마다 ‘치맥세트 맛있고 싸요. 들어오세요’ 등 술을 권하는 입간판이 서 있다. 날이 훤하게 밝았지만 네온사인 간판은 쉴 새 없이 반짝인다. 거리에는 빈 술병이 가득 담긴 플라스틱 상자가 겹겹이 쌓인 채 방치돼 있다. 이수초 6학년 유민준(11)군은 “가끔 등교할 때 보면 길에 토사물이 있다. 쪼그리고 앉아 담배 피우는 사람들과 마주치면 겁이 난다”고 했다.

초등학교가 코 앞에 있는데도 술집이 버젓이 영업을 하는 게 어떻게 가능할까. 학교 주변은 학교보건법에 따라 ‘학교환경위생정화구역’으로 지정된다. 학교 출입문에서부터 직선거리 50m까지는 ‘절대정화구역’, 학교 경계선으로부터 직선거리 200m는 ‘상대정화구역’이다. 절대정화구역에는 유흥주점이나 단란주점, 노래연습장 영업 등을 할 수 없다. 상대정화구역에선 교육지원청의 심의를 거쳐 영업을 허가받을 수 있다. 다만 술을 파는 음식점은 절대정화구역에서도 영업이 가능하다. 술을 팔아도 노래 시설이 없거나 유흥종사자가 없으면 식품위생법 상 ‘일반음식점’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출입문에서 3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포장마차나 호프집 등을 차려도 법적으로 문제가 안 되는 것이다.

법과 현실 사이에서 학부모와 아이들은 괴롭다. 한 학부모는 “일부가 모여서 동사무소나 경찰에 민원을 넣고 직접 가게 주인들을 만나봤지만 소용이 없다”며 “영업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24시간 영업이라도 자제해 달라고 부탁해 봤지만 달라진 게 없다”고 말했다. 논현초에 다니는 정모(11)군은 “포장마차 골목 쪽을 친구들이랑 지나간 적이 있는데 술 취한 아저씨들을 많이 봤다. 욕을 많이 해서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관할 구청은 개인사업자의 자유로운 영업행위를 제재할 규정이 없다는 입장이다. 강남구청 관계자는 “학교 근처에서 24시간 영업을 한다고 해서 이를 문제 삼을 규정은 없다”며 “민원을 이유로 개인 사업자의 영업행위를 강제할 수는 없다”고 답했다.

아이들의 등하굣길을 위협하는 건 취객뿐만이 아니다.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가 학부모 1242명을 대상으로 어린이 교통안전 의식조사를 했더니 통학로가 위험하다는 응답이 49%나 됐다. 30%는 “어린이 교통사고 감소를 위해서는 도로환경 개선이 가장 시급하다”고 답했다. 운전자의 서행과 안전운전이 중요하다는 응답은 27%였다.

어린이 교통사고는 하교 시간대에 집중됐다. 연구소가 최근 6년간 어린이 교통사고를 분석한 결과 어린이 교통사고 사상자는 25%가 오후 4~6시, 21%가 오후 2~4시에 몰려 있었다. 오후 6~8시도 18%가 넘었다.

또 연구소는 최근 2년간 삼성화재에 접수된 어린이 교통사고 310건을 분석한 결과 보행사고 중 55%가 주택가와 학교 근처 등의 편도 1차로 이하 이면도로에서 발생했다고 밝혔다. 연구소는 “이면도로는 구조물이나 입간판 등 때문에 운전자 시야가 가려져 보행자를 확인하기 어려워 사고가 잦다”고 지적했다.

심희정 김지방 임주언 오주환 기자 simcit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