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魏) 촉(蜀) 오(吳)로 나뉘어진 삼국시대가 위를 이은 사마(司馬)씨의 진(晉)나라에 의해 통일된 후 중국은 또 다시 거대한 폭풍에 휘말린다. 이른바 5호(胡)16국 시대다. 진이 팔왕(八王)의 난 등으로 자중지란을 겪는 사이 북쪽 소수민족들이 강성해짐에 따라 진이 이들에 밀려 양자강 이남으로 도망가 동진(東晉)이 되고 강북, 즉 원래의 중원지역은 다섯 소수민족, 곧 흉노, 선비, 저, 갈, 강이 모두 16개의 나라를 세워 다스리게 된다.
이런 흥미진진한 역사의 흐름을 소설가들이 그냥 놔둘 리 없다. 특히 촉(한)을 정통으로 여기는 이들은 오호의 융성과 진의 패퇴를 진과 그 전신인 위에 대한 촉한의 복수전으로 보고자 했다. 그래서 그런 의도로 씌어진 게 ‘속 삼국지’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중국의 옛 소설가가 쓴 이 팩션은 5호16국 중 가장 먼저 일어난 ‘한(漢)’을 촉의 후예로 설정했다. 또 나중에 조(趙 또는 前趙)로 나라 이름을 바꾼 한을 거꾸러뜨린 후조(後趙)의 석륵은 조운의 손자로 만들었다. 한은 흉노족인 유연(劉淵)이 세운 나라지만 속 삼국지는 유연을 유비의 손자, 유선의 아들로 꾸몄다. 실제 역사에서도 유연은 흉노족이면서도 한의 정통을 이었노라고, 그래서 나라 이름도 한이라고 한다고 선전하면서 거병했다. 그럼으로써 민심을 얻겠다는 복안이었다. 한은 군사를 일으킨 후 파죽지세로 서진을 밀어붙여 ‘멍석 말 듯’ 땅을 빼앗고 나중에는 서진의 황제까지 사로잡았다. 그리고 석륵은 갈족 수령이었지만 소설에서는 촉한의 명장 조운의 손자로서 촉한 멸망 시 위군을 피해 도주하다 석씨 집안의 양자로 들어가 성을 바꾼 것으로 만들었다.
재미있는 것은 소설이 진과의 전쟁에서 앞장서 싸운 한과 후조의 장수들을 촉한 명장들의 손자들로 설정한 것이었다. 즉 관우 장비 조운 황충 등의 손자들이 진나라의 장수가 돼 있는 옛날 조위(曺魏)의 명장 하후돈 허저 서황 악진 등의 후손들을 일패도지시키는 것인데 삼국지의 촉한 팬들이라면 이 대목에서 희열을 느꼈을 법도 하다. 이때 ‘속 삼국지’의 작자가 한과 후조의 장수들을 평하여 가로되 극찬한 표현이 있다. “조부(祖父)의 풍(風)이 있다”는 것. 조상의 덕을 잇는 효야말로 최고의 덕목으로 치던 시대이니 최상급 칭찬이다.
하기야 조부의 풍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게 장수들뿐일까. 다른 분야에도 할아버지를 빼닮았다는 말을 듣는 손자들은 있게 마련이다. 일전에 ‘대를 이은 배우들’에서 부자(父子) 배우 이야기를 했지만 손자가 할아버지의 뒤를 이은 조손(祖孫) 배우들도 있다.
할리우드의 전설 그레고리 펙과 그의 손자 이선 펙(30). 이선이 출연한 영화 ‘에덴(Eden. 2015)’을 봤다. 1972년에 실제로 일어났던 비행기 추락사고로 안데스산맥에 떨어졌던 우루과이 럭비팀의 조난 이야기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영화다. 우루과이 럭비팀은 당시 안데스산 속에서 죽은 동료의 시신을 먹으면서 살아남아 1993년에 ‘얼라이브’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될 만큼 큰 얘깃거리가 됐거니와 ‘에덴’은 배경을 조그만 무인도로 옮겨 얼라이브와는 사뭇 다른 얘기를 한다. 배고픔보다 생존자들 간의 갈등과 투쟁에 주안점을 둔 것. 그러다보니 마치 윌리엄 골딩의 소설 ‘파리대왕(1992년에 영화화됐다)’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영화 자체는 그다지 잘된 축에 끼지 못한다. 엉성한 각본에 어수룩한 연출, 어설픈 연기까지. 특히 이선은 상당히 잘 생긴 젊은이지만 미남의 대명사격이었던 할아버지의 붕어빵은 아닐뿐더러 할아버지가 그와 비슷한 연배에 이미 4차례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을 정도로 연기력이 출중하고 빛나는 매력을 뽐냈던데 비하면 상대가 안 된다.
하긴 손자 배우들은 아들 배우들에 비해 할아버지와 직접 비교하기 어렵다. 부자가 붕어빵처럼 닮기 쉬운데 비해 조손은 한 다리 건너이기 때문에 그처럼 똑같이 닮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대체로 배우 경력이 짧기 때문에 연기력 등을 평가하기가 아무래도 쉽지 않다.
그레고리 펙 외에 할리우드의 전설급 스타를 할아버지로 둔 손자 배우들은 이렇다. 우선 클라크 제임스 게이블(28). ‘할리우드의 킹’으로 불린 클라크 게이블의 손자인 그는 물론 1960년에 사망한 할아버지를 한 번도 생전에 본 적이 없는 만큼 할아버지와 친밀감이나 어떤 동질감 같은 것은 느끼지 못하겠지만 끝이 처진 굵은 눈썹에 가느다란 콧수염 등 할아버지와 흡사한 외모를 갖고 있어 클라크 게이블의 전기영화를 만든다 치면 젊은 게이블역으로 딱이다. 배우 겸 TV쇼 호스트로 활동 중이다. 다음은 션 플린(27). 활극의 왕자였던 에롤 플린의 외손자인 그는 역시 배우이자 사진가였던 외삼촌(에롤 플린의 아들)의 이름을 따오는 바람에 원래 성 아미르는 지워졌다. 그 역시 일세를 풍미한 핸섬보이였던 외조부를 닮아 미남이지만 이제 겨우 입문단계인 만큼 배우로서의 자질은 아직 알 수 없다. 또 스티븐 R 맥퀸(28)도 있다. ‘킹 오브 쿨’ 스티브 맥퀸의 손자인 그는 아버지 채드 맥퀸도 배우로 활동했으나 전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채 사라졌던 탓에 과연 아버지의 실패를 설욕하고 할아버지에 필적하는 배우가 될 수 있을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에 비하면 손녀들은 배우로서 할아버지만큼의 위치를 구축한 경우가 적지 않다. 드류 배리모어(41). 아역에서 출발해 ‘미녀 삼총사’ 등의 흥행작들을 통해 톱스타 자리에 오른 그의 할아버지는 20세기 초 미국 연극 영화계의 거성으로 꼽히는 존 배리모어다. 또 안젤리카 휴스턴(65). ‘프리찌의 명예’(Prizzi’s Honor)로 1985년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그의 할아버지는 ’시에라 마드레의 보물‘로 역시 1946년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받은 월터 휴스턴이다. 아버지는 같은 영화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거머쥔 배우 겸 감독 존 휴스턴. 이 정도면 가히 명가(名家)라 불려 손색이 없다.
그러나 아들 배우들과 달리 손자 배우들은 항용 아직 연륜이 일천한 탓에 섣불리 평가를 하기 힘들다. 실제로 짧은 경력 탓에 아직 스타 대접을 못 받는 경우도 많고 나아가 아예 배우로 쳐주지 않는 경우도 있다. 스타의 자녀라면 연기력이나 재능 등 자질을 검증받지 않아도 이름값만으로 영화의 주연을 턱턱 꿰차는 우리나라와 달리 아무리 위대한 배우의 손자라 해도 개성과 매력, 자질이 없으면 특별대우를 잘 해주지 않는 할리우드에서 쉽사리 할아버지처럼 되리라는 보장이 없다. 과연 앞으로 누가 치열한 경쟁에서 이겨 톱스타가 됨으로써 ‘과연 조부의 풍이 있다’는 찬사를 받을지 궁금해진다.
김상온 (프리랜서 영화라이터)
[김상온의 영화이야기] <68> 조부(祖父)의 풍(風)
입력 2016-05-02 1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