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29일 박근혜 대통령의 ‘선별적 양적완화’ 방침에 반발하며 원칙론을 공개적으로 표명해 파장을 낳고 있습니다. 선별적 양적완화는 조선·해운 부실기업 살리기에 필요한 자금을 한국은행이 새로 돈을 찍어 대라는 뜻입니다. 어려운 말로 바꾸면 한은의 발권력을 동원해 구조조정 집행기관인 KDB산업은행과 한국수출입은행의 자본을 확충해 놓는다는 의미입니다.
한은은 4·13 총선 이전엔 새누리당의 ‘한국판’ 양적완화, 여권의 총선 참패 후에는 청와대의 ‘선별적’ 양적완화 독려에 시달려 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은은 이날 “국민적 합의 또는 사회적 공감대가 먼저”라는 입장을 내세웠습니다. 또 “국책은행에 자본금 확충이 필요하다면 이는 기본적으로 재정의 역할”이라고 했습니다. 교과서적으로 맞는 말인데, 세수 구멍으로 재정 여력이 없는 박근혜정부의 아픈 부분을 건드린 겁니다. 재정론자와 통화론자의 대결 구도도 엿보입니다.
한국은행 윤면식 부총재보는 이날 “기업 구조조정 지원을 위해 국책은행에 자본금 확충이 필요하다면 이는 기본적으로 재정의 역할”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또 “중앙은행이 발권력을 활용해서 재정의 역할을 하려면 국민적 합의 또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돼야 가능한 것 아닌가 생각한다”라고도 했습니다. 청와대의 독려에도 불구하고 구조조정 집행기관인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에 돈을 새로 찍어 보내는 방식을 즉각적으로 실행하기엔 무리가 있다는 의미로 읽힙니다. 국회 동의와 국민 의견 수렴 등 법적 절차적 원칙을 하나하나 밟겠다는 의지도 담겨 있습니다.
윤 부총재보는 한은에서 통화정책을 담당하는 실무진 가운데 최고책임자입니다. 파장이 커지자 “원칙적 언급이니 확대 해석을 삼가 달라”고 주문하기도 했습니다. 현실적으로 한은의 최고 의결기구인 금융통화위원회에 한은 측 인사는 총재 부총재를 포함해 3명뿐입니다. 나머지 4명은 사실상 친정부측 추천 인사라는 한계도 존재합니다. 중앙은행의 완전한 독립은 아직 갈 길이 멉니다.
그럼에도 선별적 양적완화에 반대하는 여론은 높습니다. 한은뿐만 아니라 금융 시장에서도 부정적 반응이 나왔습니다. ‘내년 대선을 의식한 이벤트’라는 표현까지 등장했습니다.
IBK투자증권은 이날 보고서에서 “한국형 양적완화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양적완화가 아니다”라며 “개발연대 시절에 활용되던 정책금융의 부활”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 보고서는 양적완화가 제기된 배경이 ① 재정건전성에 대한 부담을 늘리지 않으면서 ②내년 대선 등의 정치적 이벤트를 앞두고 양호한 성적표를 받아야 한다는 압박 때문이라고 분석했습니다. 효과도 제한적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우리 경제가 양적완화라는 이례적인 통화정책을 사용해야할 만큼 나쁜가”라고 질문하기도 했습니다. 마이너스 금리까지 떨어진 상황도 아니고, 그렇게 아주 나쁘진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논의의 또다른 주체인 국회에서도 야당을 중심으로 반대론이 만만찮습니다. 경제정당을 자임하는 국민의당 안철수 상임 공동대표는 최고위원회의에서 “양적완화는 비전통적 통화정책”이라며 “양적완화를 고려할 정도라면 대한민국 경제가 비상상황이며 지금까지 정책은 실패했다는 걸 인정하는 게 먼저”라고 했습니다. 이어 “한국은행에서 돈을 찍어내는 건 당장 정부 재정을 안 쓰는 것처럼 보여 정부성적표는 좋게 보일지 모르나 결국 전 국민에 골고루 부담을 지우는 일”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 기사는 금융팀 우성규 김지방 기자와 정당팀 임성수 기자가 함께 취재했습니다.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