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온의 영화이야기] <67> 항공전 영화의 진화

입력 2016-04-25 15:54

모든 것은 진화한다. 좋은 방향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이때 ‘진화’는 ‘변화’와 같은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쟁도 진화한다. 그리고 그 진화를 촉진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인의 하나는 전쟁기술의 발달이다. 21세기에 접어든 현시점에서 가장 분명하게 눈에 띄는 새로운 전쟁기술은 무인항공기 또는 무인비행체로 번역되는 UAV(Uumanned Aerial Vehicle)이라고 할 수 있다. 벌이 날 때 나는 소리에 착안해 보통 ‘드론’으로 불린다.

2015년에 개봉된 앤드루 니콜 감독, 이선 호크 주연의 ‘굿 킬(Good Kill)’이 바로 이 드론을 이용해 완전히 달라진 항공전 영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 근처의 공군기지에 출퇴근하는 토머스 이건 소령은 원래 F-16 전투기를 몰던 베테랑 조종사지만 지금은 사무실에 앉아 아프가니스탄 상공에 떠있는 무장 드론(MQ-9 리퍼)을 조종해 테러리스트(용의자)들을 격살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마치 일반 월급쟁이들처럼 퇴근할 때면 바비큐 거리를 집에 사가지고 가고, 아이들을 등하교 시키는 등 일상적인 삶을 살지만 그가 하는 ‘업무’는 드론을 조종해 사람들을 죽이는 일이다.

이건 소령의 지휘관 잭 존스 중령이 신참 드론 조종사들에게 하는 훈시가 이런 달라진 전쟁양상을 간명히 요약한다. “어떤 이들은 우리를 공군(Air Force)이 아니라 의자군(Chair Force: 하늘을 날며 비행기를 조종하는 게 아니라 의자에 앉아 드론을 조종한다는 의미로 ‘에어’와 ‘체어’의 발음을 이용한 말장난)이라고 조롱한다. 그러나 우리가 수행하는 것은 전쟁이다. ‘외과수술적 정밀 국부타격(surgical strike)’이니 ‘위협의 중화(neutralizing of the threat)’ 같은 희한한 표현을 쓰지만 결국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다만 우리의 전쟁은 ‘1인칭 슈팅 게임’이다. 비디오게임을 모델로 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물론 그렇다고 우리가 방아쇠를 당겨 죽이는 건 게임의 캐릭터가 아니다. 피와 살을 지닌 인간이다.”

말하자면 이제 공군의 엘리트는 제트 파일러트가 아니라 ‘조이스틱 라이더(joystick rider)’라는 얘기. 이런 조이스틱 라이더들과 2차대전을 다룬 항공전 영화의 고전 ‘정오의 출격’(오역이다. ‘12시 방향 상공의 적기’라고 해야 맞다. Twelve O'clock High, 1949)에 나온 그레고리 펙을 비롯한 B-17 폭격기 조종사 등 승무원들의 모습을 비교해보라.

이 영화뿐일까. 1차대전 당시 마치 장난감 같은 복엽기를 타고 상대 조종사의 얼굴을 직접 마주 보면서, 결투하는 서부의 건맨처럼 싸우던 ‘블루 맥스(Blue Max, 1966)’와 ‘플라이보이스(Flyboys, 2005)’의 고색창연한 공중전은 어떻고, 역시 2차대전을 다룬 항공전 영화의 또 다른 명작, 가이 해밀턴 감독에 로렌스 올리비에, 마이클 케인 등 올스타 캐스트가 빛을 발했던 ‘공군대전략(The Battle of Britain, 1969)’은 어떤가. 이밖에 ‘정오의 출격’과 마찬가지로 2차대전을 배경으로 역시 ‘나는 요새(The Flying Fortress)’라는 애칭으로 불린 B-17 폭격기와 그 승무원들의 사투와 애환을 그린 스티브 맥퀸 주연의 ‘순간에서 영원으로(War Lover, 1962)’와 매튜 모딘, 에릭 스톨츠 등 당시 유망한 젊은 배우들이 대거 출연했던 ‘멤피스 벨(1990)’, 그리고 영국의 모스키토 경폭격기 부대의 활약상을 그린 클리프 로버트슨 주연의 ‘장렬! 633 폭격대(633 Squadron, 1964)’도 비교대상으로 충분하다.

물론 그 이후의 항공전 영화들도 있다. 6.25를 배경으로 한 윌리엄 홀든 주연의 ‘원한의 도곡리 다리(The Bridge at Togo-Ri, 1954)’. 다만 이 영화는 항공전 영화이긴 해도 공군 아닌 ‘해군영화’다. 전투기들이 지상의 다리를 폭격하는 내용이지만 동원된 비행기는 항모의 함재기인 F9F 팬더이고 조종사도 해군이었다. 또 베트남전을 소재로 한 ‘최후의 출격(The Flight of Intruder, 1991)’도 있다. 공격기 A-6 인트루더가 나온다.

그러나 이 영화들은 그 시대적 배경이야 어찌됐든 무장 항공기들의 폭격이나 공중전, 대지 공격을 다룬 항공전 영화들로서 조종사들이 실제로 하늘을 난다는 일관된 내용을 지닌다. ‘굿 킬’과는 태생 자체가 다르다. ‘굿 킬’은 굳이 분류하자면 항공전 영화라기보다는 외계인과의 전쟁을 아이들의 슈팅 컴퓨터 게임으로 환원시킨 ‘엔더의 게임’과 동종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그러다보니 과거의 항공전 영화들과 ‘굿 킬’에 나오는 조종사들은 그 차이가 아주 뚜렷하다. 무엇보다 옛날 영화 조종사들이 격추의 공포에 시달리며 거듭되는 출격 임무에 지쳐 하루 빨리 고향의 가족들에게 가고 싶어 애를 태우는 반면 가족들이 기다리는 안온한 집에서 지척인 기지로 출퇴근하는 ‘굿 킬’의 조종사는 다시 전투기를 몰고 하늘을 나는 임무를 맡고 싶어 안달한다.

사정이 이렇다면 전장의 하늘에 피어나고 스러지는 용감한 조종사들의 얘기는 머지않아 마치 ‘트로이전쟁의 전사’들처럼 여겨질지 모르겠다. 아득한 과거의 흘러간 유물.

영화 ‘굿 킬’은 이처럼 프레임 자체가 바뀐 항공전의 새로운 양태만 얘깃거리로 제시하지 않는다. 드론으로 대표되는 무장 인공지능(AI)에 어느 정도의 자율(결정)권을 주어야 하는지의 문제도 제기한다. 이건 소령을 비롯한 영화의 주인공 조종사들은 드론의 공격으로 민간인들까지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로 살상대상이 되는 것을 목격하고는 과연 그같은 명령을 따라야 하는지 회의하다가 결국 고의로 명령을 위반한다.

명령을 내리는 쪽의 입장에서 봤을 때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전쟁이나 전투의 큰 그림을 그리고, 거기에 따라 때로 ‘불합리하지만 불가피한’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는 지휘부로서 스스로의 사고와 의지, 판단에 따라 명령을 거부하는, 말 안 듣는 인간 조종사들이 과연 필요한가. 스스로 비행하면서 아무런 회의나 고민, 주저함 없이 명령을 무조건 그대로 수행하는 드론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만일 그렇게 된다면 이 경우 드론은 일단 큰 틀의 명령만 있으면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 인간을 얼마든지 살상하는 살인로봇 ‘터미네이터’가 된다. 군인 등 전쟁에 직접 참여하는 인간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만들어낸 드론이 오히려 전쟁과는 무관한 민간인을 포함해 더 많은 인간 희생자를 낼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뒷날 드론은 인간이 기계의 지배를 받는 시대의 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을지도 모르겠다.

김상온 (프리랜서 영화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