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판 위에서 탱크처럼 상대 선수를 밀어붙이는 이 남자. 외모부터 예사롭지 않다. 순해 보이는 동그란 얼굴엔 장난기가 가득하다. 시선을 아래로 향하면 움찔 놀라게 된다. 키 178㎝에 몸무게 93㎏. 몸엔 화려한 문신이 새겨져 있다. 목까지 타고 올라온 문신도 있다. 좋아하는 아이스하키를 몸에 남기고 싶을 뿐, 조폭 흉내를 낼 생각은 없다고 한다. 그런데 이 남자 별명이 ‘핑크보이’란다. “분홍색을 좋아해요. 헬멧과 글러브, 스케이트 끈, 허리띠, 스틱을 분홍색으로 치장했죠. 그래서 사람들이 절 핑크보이라고 불러요.” 스스로를 소심하다고 하면서 빙판 위에서 서면 ‘헐크’로 돌변하는 이 남자는 박태환(27)이다.
21일 고려대 아이스하키 링크. 박태환은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신생팀 대명아이스하키단이 국내 최초로 실시한 트라이아웃을 치른 직후였다. 그의 얼굴엔 생기가 가득했다. “누구보다 잘나가다가 밑바닥으로 추락했습니다. 이제 대명아이스하키단에서 다시 꿈을 향해 뛰어야죠.”
박태환은 한국 아이스하키의 유망주였다. 경복고를 거쳐 연세대에 입학한 박태환의 미래는 장밋빛이었다. 그러나 2학년 때 양쪽 다리에 피가 통하지 않아 조직이 괴사되는 구획증후군이라는 희귀병 진단을 받았다. 이때부터 인생이 조금씩 꼬이기 시작했다. 2011년 9월 실업 명문 안양 한라에 입단한 박태환은 시즌을 마친 뒤 구획증후군 1차 수술을 받았다. 2년 뒤엔 두 번째로 수술대에 올랐다.
박태환은 병마와 싸우느라 경기력이 떨어졌다. 주전 경쟁에서 조금씩 밀렸다. 그렇게 좋아했던 아이스하키가 싫어졌다. 빙판 위에 서면 힘이 나는 것이 아니라 짜증이 났다. 설상가상으로 치명적인 부상까지 찾아왔다. 2014-2015 아시아리그 두 번째 경기에서 왼쪽 정강이뼈가 부러진 것. 그 여파로 한라와 재계약에 실패하는 불운을 겪었다.
2015년 4월 21일 박태환은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후에 평범한 직장 생활을 할 마음은 없었습니다. 격투기로 전향하려고 했어요. 싸우는 거 하나는 자신 있었거든요. 어렸을 때 복싱을 좀 했는데, 잘한다고 칭찬을 많이 들었죠. 헤헤.”
타고난 싸움닭 박태환은 아시아에선 보기 드문 인포서(Enforcer)임을 자부한다. 좁은 링크에서 빠른 스피드로 경기를 하는 아이스하키에선 수시로 선수들과 충돌이 일어난다. 이럴 때 인포서는 몸싸움으로 상대 선수의 거친 플레이를 막고, 때로는 동료에게 가해진 위협 행위에 보복하기 위해 주먹다짐을 벌이기도 한다. 아시아리그에선 주먹다짐이 허용되지 않아 인포서 역할을 하는 선수가 거의 없다.
골을 넣는 것보다 상대 선수에게 강력한 보디체크를 가하는 것이 더 짜릿하다는 박태환. 그는 왜 인포서 역할을 즐기는 것일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경기에만 나서면 투지가 활활 불타올라요. 인포서는 팀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예요. 팀이 주눅 들었을 때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게 바로 인포서입니다.”
못 말리는 인포서 박태환은 결국 격투기 선수가 되진 못했다. 독립리그 인빅투스 웨이브즈의 김홍일 감독이 그의 마음을 돌려놓았기 때문이다. 박태환은 인빅투스 웨이브즈와 동양 이글스에서 활약하며 아이스하키와의 인연을 이어갔다.
21일부터 이틀에 걸쳐 이번 트라이아웃에 참가한 박태환은 절박하다. 그는 꼭 입단하고 싶다고 했다. 아니, 꼭 입단해야 한다고 했다. “왜냐고요? 운명의 여인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5월 7일 결혼해요. 이제 안정된 생활을 하며 운동에만 전념하고 싶어요.”
박태환은 넉 달 전 초등학교 동창으로부터 황성희(28) 씨를 소개받았다. 몇 번 만나 보니 식성과 성격 등 통하는 게 많았다. 그는 사람을 많이 가리는 편이기 때문에 쉽게 마음을 주지 않는 편인데, 황 씨에겐 마음의 문이 저절로 열렸다. 밖으로 돌아다니며 술을 마시고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박태환은 “좋은 남편이 될 자신이 있다”며 웃었다.
박태환에겐 또 다른 꿈이 있다. 국가 대표팀에 복귀하는 것이다. 그는 지난해 11월 태극마크를 달고 폴란드 카토비체에서 열린 유로 아이스하키 챌린지에 출전했다. 당시 백지선 감독은 박태환의 투지 넘치는 플레이를 보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다시 국가대표로 뽑힌다면 몸이 부서져라 뛰겠다”는 이 남자. 마음은 벌써 평창동계올림픽에 가 있다.
김태현 기자 taehyu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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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4-22 13: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