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新星) 클로이 모레츠가 주연한 2016년작 최신 SF영화 ‘제5의 침공(5th Wave)’을 봤다. 시기적으로는 ‘최신’이지만 영화 자체는 구태의연했다. 이제까지 나왔던 낯익은 여러 영화들을 얼기설기 짜 맞춘 데 불과한 내용이었다. 구체적으로 지구종말(apocalypse) 영화를 기본 뼈대로 외계인 침략영화, 특히 어린아이들을 외계인과의 전쟁에 동원한다는 ‘엔더의 게임’에 여자아이가 동생을 구하기 위해 투쟁의 선봉에 나선다는 ‘헝거게임’ 같은 청소년 모험영화를 적당히 뒤섞어놓은 것이었으니.
조나산 블레이크슨이라는 영국의 젊은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를 보면서 반작용으로 훌륭한 종말영화들이 머리를 스쳐갔다. 좋은 종말영화는 인간의 미래에 대한 통찰력의 일단을 제공한다. 원래 ‘세상의 종말’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아포칼립스, 또는 그 이후를 의미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SF소설의 하부장르 가운데 하나로서 나름대로 굳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거니와 그 쇼킹한 내용이 영화제작자들의 입맛에도 맞았음인지 영화계에서도 이 장르를 받아들여 옛날부터 이제까지 수많은 아포칼립스 영화들이 나왔다.
일찍이 1933년에 펠릭스 피스트 감독이 만든 ‘대범람(Deluge)’. 바닷속 대지진으로 인한 쓰나미로 인간세계가 파멸하는 모습을 그린 이 영화는 그 당시에 벌써 범람하는 바닷물이 뉴욕시를 삼키는 장관을 선보였다. 그러나 이후 과학기술의 진보에 대한 믿음과 함께 유토피아적 멋진 미래의 환상에 젖어있던 1960년대까지 종말영화들은 그다지 많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기억나는 것 몇 개만 보면 ‘우주전쟁(War of the Worlds, 1953)’ ‘신체강탈자의 침입(Invasion of the Body Snatchers, 1956)’ ‘그날이 오면(On the Beach, 1959)’ ‘트리피드의 날(The Day of the Triffids, 1962)’ ‘지구 최후의 사나이(The Last Man on Earth, 1964)’ 정도.
‘우주전쟁’은 H G 웰스의 유명한 SF소설이 원작으로 화성인이 지구를 침공해 인류 멸망 직전까지 갔다가 간신히 기사회생한다는 얘기고, 잭 피니의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한 돈 시겔 감독의 ‘신체강탈자의 침입’은 지구인의 탈을 뒤집어쓴 외계인의 지구 침공을 그린 것으로 인간과 구별하기 어려운 외계인은 당시 미국사회에 침투한 공산주의 첩자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지구인과 구별이 안 되는 외계인 색출작업은 당시 미국을 뜨겁게 달군 맥카시 선풍을 은유한 것으로도 알려졌다. 이 영화는 걸작이라는 평을 받으면서 이후 두세 차례 리메이크됐다. 또 핵전쟁 이후를 그린 그레고리 펙, 에바 가드너 주연의 ‘그날이 오면’ 역시 고전 명작으로 칭송받는 작품이다. 명장 스탠리 크레이머가 감독했다. ‘트리피드의 날’은 저명 SF작가 존 윈덤의 소설이 원작으로 스스로 이동 가능한 지적 식물 트리피드가 인간을 말살하고 지구를 지배한다는 암울한 얘기다. 뱀파이어가 지구를 장악한 상황에서 혼자 살아남은 사나이가 뱀파이어들과 싸운다는 빈센트 프라이스 주연의 ‘지구 최후의 사나이’는 리처드 매티슨 원작으로 나중에 찰턴 헤스턴의 ‘오메가 맨(1971)’, 윌 스미스의 ‘나는 전설이다(2010)’로 리메이크됐다.
그러나 종말영화들은 어쩌다 한편씩 나오는데 지나지 않았고 60년대 말이 돼서야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과학기술의 역기능이 두드러지고 인간사회의 복잡성이 크게 증가하면서부터였다. 종말영화의 전제가 되는 종말의 원인도 매우 다양했다. ①핵전쟁 및 방사능 낙진 ②외계인의 침공 ③조지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Living Dead)’ 3부작에서 시작된 좀비의 창궐 ④ 바이러스 등 각종 질병의 만연 ⑤환경오염 및 기상이변에 따른 자연재해 ⑥인공지능과 기계를 포함한 로봇의 반란 ⑦인간 유전자 조작 오류 ⑧초자연적 현상 ⑨신(神)의 심판 등 종교적 파국 ⑩자원 고갈 ⑪경제 및 금융의 붕괴 등. 이외에 인구과잉과 독재 및 전체주의의 부상도 있다.
이런 원인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종말영화들 가운데는 ‘매드 맥스’(핵전쟁)라든가 ‘매트릭스’(기계의 반란), ‘28일 후(28 Days After, 좀비 바이러스의 창궐)’같은 시리즈물과 새로운 빙하기를 맞은 지구를 그린 로버트 올트먼의 ‘퀸텟(Quintet, 1979)’, 불임(不姙)증의 만연으로 인류사회가 종말 위기를 맞은 속에서 최후의 가임여성을 지키기 위한 한 사나이의 고군분투를 내용으로 하는 알폰스 쿠아론의 ‘인간의 아이(Children of Men, 2006)’등 볼만한 것들이 많다. 물론 원인 같은 것에는 아예 관심을 두지 않은 채 그저 종말 이후의 상황만 집중적으로 묘사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도 있다. 퓰리처상을 받은 코맥 맥카시의 원작소설을 같은 이름으로 영화화한 ‘로드(The Road, 2009)’. 존 힐코트 감독이 원작의 정신을 최대한 살려 만들었다는 이 영화는 종말영화의 수작으로 꼽혀 마땅하다.
반면 원작은 맥카시의 작품처럼 걸작 소리를 들어 전혀 이상하지 않은데도 형편없는 영화로 만들어진 경우도 적지 않다. 할란 엘리슨의 걸작 중편을 같은 제목으로 배우 L Q 존스가 감독한 ‘소년과 개(A Boy And the Dog, 1975)’, 데이빗 브린의 멋진 소설 ‘포스트맨’을 역시 배우 케빈 코스트너가 싸구려 서부활극으로 개악한 ‘포스트맨(The Postman, 1997)’이 대표적이다.
앞으로도 종말영화들은 끊이지 않고 나오겠지만 이런 영화들과 ‘제5의 침공’을 보노라면 마치 ‘종말영화의 종말’이 온 것 같다.
김상온(프리랜서 영화라이터)
[김상온의 영화이야기] <65> 종말영화의 종말?
입력 2016-04-19 1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