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황금기를 주름잡은 스타들은 많다. 하나같이 멋진 위대한 배우들이지만 그중에서도 갈수록 내 마음속에서 빛을 발하는 이가 그레고리 펙이다. 무엇보다 ‘앵무새 죽이기(To Kill a Mockingbird, 1962)’의 정의로운 변호사 애티커스 핀치로 기억되는, ‘진정한 신사’ 캐릭터를 대표하는 이 대배우의 매력은 새삼 설명할 것도 없거니와 생소한 젊은 배우들이 판치는 요즈음 새삼 그의 모습이 보고 싶어 그의 영화를 한편 찾아봤다.
펙의 영화치고는 과히 잘 알려지지 않은 ‘I Walk the Line(1970)’. 작은 마을의 나이 지긋한 유부남 보안관이 자기 나이의 절반도 안 되는 젊은(혹은 어린) 아가씨와 사랑에 빠져 의무와 욕망, 법과 폭력, 명예와 수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는 내용이다. 나름대로 괜찮은 감독이라는 평을 듣는 존 프랑켄하이머가 연출하고 펙이 주연했음에도 영화 자체로만 보면 그다지 신통치는 않다. 오히려 영화보다 영화가 제목을 차용한 조니 캐쉬의 노래가 더 돋보인다.
‘I Walk the Line’은 ‘미국판 트로트’라 할 수 있는 컨트리 앤드 웨스턴 장르의 명곡이다. 한때 이 분야의 제왕으로 불렸던 조니 캐쉬(1932~2003)가 1956년에 발표한 그의 최고 히트곡. 그래서 이 노래는 2005년에 호아킨 피닉스 주연으로 만들어진 캐쉬의 전기영화 제목으로도 쓰였다. 다만 이때는 ‘I’가 빠진 ‘Walk the Line’이었다. 이 영화와 펙이 주연한 ‘I Walk the Line’을 혼동하지 말 것.
펙의 이 영화를 계기로 ‘영화가 된 노래’들이 떠올랐다. 보통 영화음악이라면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음악들을 말하지만 이처럼 때로는 음악이 먼저이고 영화가 그 뒤를 따라 만들어진 경우들이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개리 마셜이 감독하고 리처드 기어, 줄리아 로버츠가 공연해 흥행에 크게 성공한 ‘프리티 우먼(Pretty Woman, 1990)’이다. 다 알다시피 이 제목은 로이 오비슨의 1964년 곡 ‘Oh, Pretty Woman’에서 따왔다. 이 노래는 무려 700만장이나 음반이 팔린 오비슨의 최대 히트곡이었다. 2004년에는 음악전문지 롤링 스톤이 선정한 ‘역사상 가장 훌륭한 노래 500곡’ 중 222위에 오르기도 했다.
또 괴짜 감독 데이비드 린치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블루 벨벳(Blue Velvet, 1986)’도 있다. 심리적 공포와 느와르를 결합한 신(新) 느와르 미스터리물로 분류되는 이 영화는 기괴하면서도 관능적인 분위기로 컬트 걸작의 반열에 올라있다. 제목은 영화에 삽입된 바비 빈튼의 1963년 히트곡과 같다. 다만 이 노래는 당초 토니 베넷의 1951년곡이 오리지널이지만 빈튼의 리메이크가 훨씬 더 유명하다.
이와 함께 테리 길리엄 감독의 블랙코미디 SF ‘브라질(Brazil, 1986)’과 해롤드 베커가 감독하고 알 파치노가 주연한 스릴러 ‘Sea of Love(1989)’도 빼놓을 수 없다.
‘브라질’은 조지 오웰의 ‘1984’ 스타일의 디스토피아를 그린 SF물로서 브라질에서 대단히 히트한 노래 제목을 따왔다(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희한하게도 ‘여인의 음모’라는, 말도 안되는 제목이 붙여져 나왔다). 원래 브라질이라는 노래 제목은 미국에서 붙여진 것이고 원제목이 ‘Aquarela do Brasil(브라질의 수채화)’인 이 노래는 1939년에 발표된 브라질 최대 히트곡 가운데 하나다. 영화에는 제프 멀도가 부른 노래가 삽입됐으나 세계적으로 알려지기는 1957년 프랭크 시나트라가 부른 노래를 통해서이고 이후 빙 크로스비, 레이 카니프, 폴 앵카 등도 이 노래를 불렀다.
‘Sea of Love’는 1959년 필 필립스가 발표해 즉각 빌보드 차트 리듬 앤드 블루스 부문 1위를 차지했던 명곡이지만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진, 영화에 흐르는 노래는 허니드리퍼스의 것이다. 마치 그룹 이름처럼 끈적거리는 노래의 분위기와 역시 끈적대는 영화의 분위기가 잘 맞아떨어졌다. 허니드리퍼스는 레드 제펠린의 리드 싱어였던 로버트 플랜트가 1981년 록에 리듬 앤 블루스를 결합할 목적으로 결성한 그룹으로 허니드리퍼스가 부른 이 노래는 발표된 이듬해인 1985년 빌보드 차트 3위에 올랐다.
이밖에 노래와 영화제목이 같지는 않지만 먼저 유명해진 노래를 영화에 삽입해 영화도 살고 노래도 더욱 유명해진 케이스도 적지 않다. 패트릭 스웨이지와 데미 무어가 공연해 크게 성공한 ‘사랑과 영혼(Ghost, 1990)’에 삽입된 ‘언체인드 멜로디(Unchained Melody)’. 원래 이 노래는 1955년 ‘언체인드’라는 영화의 주제가로 만들어졌으나 당시에는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후 수많은 가수들이 이 노래를 리메이크했다. 알려지기로는 전 세계적으로 무려 670명이 1500장의 음반을 낸 것으로 돼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게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영화에서 흘러나오는 라이처스 브라더스의 1965년 버전이다. ‘사랑과 영혼’에 삽입된 이 노래는 미국영화연구소(AFI)가 2004년 선정한 ‘영화 100년 영화음악 100곡’ 가운데 27위에 올랐다.
이른바 반문화영화의 대표작 ‘이지 라이더(Easy Rider, 1969)’에 삽입돼 수많은 젊은이들의 심장을 쿵쾅거리게 만들었던 스테픈울프의 클래식 록 명곡 ‘Born To Be Wild’는 또 어떤가. 일부의 주장에 의하면 최초의 헤비 메탈 음악으로 꼽히기도 하는 이 노래는 당초 1967년 스테펜울프가 처음 발표했을 때는 노래 도입부에 오토바이 엔진 굉음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그러나 영화에 사용됐을 때는 이 부분이 삽입돼 있었다. 그 결과 이 노래는 이젠 오토바이 하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음악이 됐거니와 AFI 선정 영화음악 100곡 가운데 29위에 들어있기도 하다.
그런가하면 아주 오래된, 그야말로 클래식 스탠더드 팝송이 영화에 사용돼 새롭게 조명을 받은 경우도 있다. 로맨틱 코미디의 고전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When Harry Met Sally, 1989)’에 삽입된 ‘It Had To Be You’. 1924년에 처음 나왔으니 어언 100년 가까이 된 이 고전 팝송은 프랭크 시나트라, 토니 베넷, 페리 코모 등 수많은 가수가 불렀을 뿐 아니라 이미 영화에 여러 번 사용됐다. 즉 1942년 영화 ‘카사블랑카’에서 흑인 피아니스트 둘리 윌슨이 불렀고, 1977년에는 ‘애니 홀’에서 다이앤 키튼이 부르기도 했는데 노래 자체로는 시나트라 버전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해리가~’에서는 제2의 프랭크 시나트라로 불리는 재즈 가수 해리 코닉 주니어가 불렀다. AFI 선정 영화음악 100곡 중 60위. 해리 코닉 주니어는 이 노래를 포함한 이 영화의 음악으로 그래미상 남자 재즈보컬상을 수상했다.
김상온 (프리랜서 영화라이터)
[김상온의 영화이야기]<64>영화가 된 노래들
입력 2016-04-19 1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