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T.와 젝키… 우리 모두 누군가의 소녀팬이었다”

입력 2016-04-19 18:13

풍선 좀 흔들던 때 얘기를 해보려 한다. 그 시절 ‘팬질’은 참으로 쉽지 않았다. 인터넷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1990년대, ‘오빠들’을 만날 수 있는 매개는 TV나 라디오, 잡지뿐이었다. 신문은 가끔 오빠들 기사가 실리면 부모님 몰래 챙겨 스크랩하는 정도.

오빠들이 출연한 TV 프로그램을 다시 보려면 공 테이프에 녹화를 해둬야 했다. 본방송 시간에 딱 맞춰 기다렸다 떨리는 손으로 녹화 버튼을 누른다. 약속이 있어 방송을 놓칠 땐 가족들을 붙잡고 통사정을 한다. 오늘 몇 시, 무슨 프로그램 녹화 좀 해달라고. 라디오도 마찬가지다. 매번 녹음을 하다보니 방 한구석 카세트테이프가 수북이 쌓인다. 비디오테이프나 카세트테이프가 아예 사라져버린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광경일 테다.

그보다 먼저, 오빠들 일정 파악부터 번거로웠다. 가수별 팬클럽에서 운영하는 사서함 번호가 있었다. 거기로 전화를 걸면 녹음된 음성으로 스케줄 안내 메시지가 흘러나온다. 그걸 몇 번씩 반복해 들으며 메모를 한다.

콘서트라도 한 번 가려면 어땠나. 클릭 몇 번으로 뚝딱 티켓을 살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은행에서 콘서트 표를 팔았다. 예매 시작일 아침 은행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섰다. 학교를 빼먹고 온 학생도, 딸 부탁에 대신 표를 사러 나온 엄마·아빠도 있었다.

티켓을 손에 넣으면 형광색지를 사다가 플래카드 제작에 들어간다. LED 야광 플래카드 같은 건 꿈도 못 꾼다. 야광봉도 사치다. 풍선 하나, 그리고 튼튼한 팔뚝만 있으면 충분했다.


이제와 돌아보니 정말 치열했다. 열정이 넘쳤던 왕년의 10대 소녀팬들은 이제 어엿한 성인이 됐다. 십여년이 흘렀으니 대부분 30~40대가 됐겠다. 저마다 직장 생활을 하거나 가정을 이루고 살아갈 테다. 가끔은 풋풋했던 옛날을 추억하면서.

그때 그 시절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선물같은 소식이 계속 들려오고 있다. 1세대 아이돌 젝스키스(젝키·은지원 이재진 김재덕 강성훈 장수원 고지용)가 16년 만에 재결합했다. 젝키가 해체를 선언했던 2000년 드림콘서트에서 노란 우비를 입고 울던 소녀들에게 이처럼 반가운 소식이 또 있을까. 이를 성사시켜준 MBC ‘무한도전’(무도)에 무한 감사할 따름이다.

요즘 여초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젝키 관련 글이 수두룩하다. 각자의 추억을 나누며 이야기꽃을 피운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희소식이 하나 더해졌다. H.O.T.(에이치오티·문희준 토니안 장우혁 강타 이재원)의 컴백이 가시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H.O.T.는 국내 아이돌 그룹의 시초이자 레전드다. 비슷한 시기 활동했던 젝키, S.E.S(에스이에스), 핑클, god(지오디), 신화와 견주어도 단연 압도적인 팬덤을 자랑했다. 그간 수차례 복귀설이 나돌았으나 매번 불발됐다. 데뷔 20주년인 올해는 왠지 느낌이 좋다. 최근 멤버들과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총괄 프로듀서의 만남이 성사되기도 했단다.


팍팍한 일상에 찾아온 단비 같은 이야기들이다. 오랜만에 맞춰진 추억의 조각들이 뭉클하다. 잊고 살았지만, 실은 많이 그리웠던 걸까. 무도 컴백 무대에서 은지원은 “팬들의 마음을 생각해보면 첫사랑을 만나는 느낌일 것 같다”고 말했다. 무릎을 탁 쳤다. 우리는 지금 과거 기억이 현재의 위로가 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는 중이다.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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