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바둑대결 이후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AI) 또는 로봇이 화제다. 이 9단을 무참히 패배시킨 인공지능에 대한 찬탄부터 인공지능이 이대로 발전되다가는 인간의 일자리를 모두 빼앗는 것은 물론 나아가 인간을 적대시하거나 지배하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까지 이런 저런 말들이 넘쳐난다.
엄밀히 말해 AI와 로봇은 다르다. 하지만 많은 경우 같은 의미로 혼용되기도 한다. 일례로 로봇공학의 선두주자 미국의 카네기멜론대학은 2003년부터 현실과 허구를 망라해 인간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최고의 로봇을 뽑아 헌액하는 ‘로봇 명예의 전당(Robot Hall of Fame)’을 운영해왔는데 여기서 로봇은 광의의 AI를 포괄한다. 지금까지 영화 등 픽션에서 묘사된 로봇, 또는 인공지능은 대단히 많지만 로봇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것들은 몇 안 된다. 이는 여기 헌액된 것들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뜻이다. 로봇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영화에 나온 로봇 또는 AI는 다음과 같다(이게 전부다).
▲2012년: 월-E(Wall-E). 2008년에 나온 디즈니-픽사 애니메이션의 주인공. 2105년 오염 등으로 인해 죽어가는 지구를 인간이 버리고 우주로 떠난 뒤 혼자 남아 쓰레기 청소 및 인간이 남기고 간 유산을 찾아 돌보는 임무를 맡아 700년 동안 묵묵히 임무를 수행한다. 어느 날 지구의 상태가 어떻게 됐는지 보려고 인간들이 지구로 보낸 로봇과 사랑에 빠진다. 모든 좋은 SF가 그렇듯 날카로운 사회비평을 담고 있다. 과도한 소비주의의 병폐와 로봇공학의 어두운 측면 등.
▲2010년: 터미네이터 T-800과 휴이, 듀이, 루이. 그 유명한 T-800은 마치 진짜 로봇이기라도 한 양 무표정한 얼굴과 인간 같지 않은 커다란 덩치로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최고의 적역을 얻었던 출세작 ‘터미네이터(제임스 카메론 감독, 1984)’의 인간형 사이보그 로봇이다. 원래 인간 살상용 살인기계여서 인간의 눈을 속이기 위해 인간과 아주 흡사하게 만들어졌다. 예컨대 기계 골격 위에 진짜 인간의 피부와 흡사한 인조피부를 씌워 다치면 피를 흘린다.
휴이 듀이 루이는 원래 디즈니 만화 캐릭터-도널드 덕의 말썽꾸러기 조카들-이다. 그러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의 특수효과를 담당했던 더글러스 트럼블의 첫 연출작이었던 1972년 영화 ‘사일런트 러닝(Silent Running)'에서는 우주선 ‘밸리 포지’호에서 수리 및 정비 기능을 수행하는 작업로봇들이다. 말도 못하는 이 로봇들은 당초 이름도 없이 드론 1,2,3호로 불렸으나 우주선에 홀로 남은 우주인 프리맨 로웰(브루스 던)이 사람처럼 만들어간다. 이름도 붙여주고 포커하는 법과 식물 재배법을 가르치는가 하면 심지어 자신이 다리를 다치자 수술하는 법까지 가르친다. 이 로봇들은 비록 말은 못해도 나름대로 개성과 매력을 과시하면서 로웰과 우정을 나눈다.
▲2008년: 데이터 중령. ‘스타트렉, 더 넥스트 제너레이션(TNG)’에 등장하는 안드로이드 로봇. 강력한 힘과 백과사전을 능가하는 지식을 갖추고 있다. '스타트렉 TNG‘는 원래 1987~1994년에 방영된 TV시리즈이지만 ’스타트렉‘이 극장용 시리즈 영화로 만들어졌을 때 7편(Star Trek Generations, 1994)부터 10편(Star Trek: Nemesis, 2002)까지의 배경이 됐다. 외관상 인간과 분간하기 힘든 데이터 중령은 과연 로봇과 인간의 차이는 무엇인지에 관해 끊임없이 의문을 던지는가 하면 인간 밖의 제3자적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인간들을 관찰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오리지널 시리즈의 주역이었던 외계인 1등 항해사 스포크를 승계한 캐릭터로 볼 수 있다.
▲2006년: 데이빗, 마리아, 고트. 데이빗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인공지능(AI, 2001)'에 나오는 귀여운 꼬마 안드로이드다. 자식이 없는 인간에게 자식 노릇을 해주는 인간형 로봇이다. 뛰어난 지적능력과 인간과 공감할 수 있는 감정능력까지 갖췄다. 데이빗은 앞으로 인간과 로봇이 어떤 관계를 이뤄야 하는지 새로운 비전을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마리아는 영화에 최초로 등장한 로봇이자 최초의 여성형 로봇이다. 프리츠 랑이 연출한 독일 흑백 무성영화 ‘메트로폴리스(1927)’에 나왔다. 비록 영화 초창기에 만들어졌을망정 금속 광채가 눈부신 그 모습은 영화사상 가장 뚜렷한 하나의 아이콘으로 남아있다.
고트(Gort)는 고전 명작 ‘지구가 멈춘 날(The Day the Earth Stood Still, 1951)'에 등장한 인간형 외계 로봇이다. 로버트 와이즈가 감독한 이 영화에서 고트는 평화 임무를 띠고 지구에 온 외계인의 보디가드 역할로 나왔다. 비록 흑백영화지만 비행접시에서 내려오는 그 모습은 당시 관객들에게 대단히 충격적이고 인상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고트는 손가락에서 발사하는 광선으로 무엇이든 증발시켜버리는 능력을 가졌으나 그의 폭력성은 인간이 유발한 것이었다. 모르는 것,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 공격성이 원인이었던 것.
▲2004년: 로비, C-3PO, 아톰(아스트로 보이). 로비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진 프레드 윌콕스 감독의 고전 SF 명작 ‘금지된 행성(Forbidden Plnet, 1956)'에 나오는 로봇이다. 영화사상 최초의 초광속 우주선이 나오는가 하면 처음으로 지구가 아닌 외계 행성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이 영화에서 로비는 로봇 이상의 역할을 하면서 영화에 웃음을 주는 역할을 한다. 로비는 영화에서 아이작 아시모프의 유명한 ’로봇 3원칙‘을 준수하는데 영화의 어떤 사람 등장인물보다 더 관객의 주의를 끌면서 오늘날 컬트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모습은 인간형과 깡통형의 절충형이다.
C-3PO는 유명한 ‘스타워즈’ 시리즈에 나오는 인간형 2족 보행 로봇이다. 그러나 로봇임에도 등장인물 누구보다 더 인간을 닮았다. 걸핏하면 불안에 빠지는 등 ‘걱정도 팔자’고 온갖 일에 안달복달하는가 하면 수다스럽고 실수투성이에다가 친구들과 의리도 있다. 원래 아나킨 스카이워커(나중에 다스 베이더가 되는)가 9살 때 가사도우미용으로 폐품 쪼가리를 주워 만들었지만 뛰어난 공감능력과 언어능력을 갖춰 인간과 로봇 등 기계, 인간과 외계인 등 다른 생물들 간의 간격을 좁혀주는 다리 역할을 하는 궁극적인 ‘사회성 로봇’이다. 유창한 언어능력과 커뮤니케이션 스킬을 갖춘 진짜 로봇을 만들고자 하는 과학자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아톰은 일본의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가 1951년에 만화책으로 첫 선을 보인 뒤 1963년부터 만화영화로 제작된 ‘무쇠팔(鐵腕) 아톰’의 인간형 로봇이다. ‘아스트로 보이’는 아톰이 미국에 수출됐을 때 붙여진 미국식 명칭. 겉모습은 어린아이지만 하늘을 날 수 있는 로켓 분사 다리를 비롯해 엄청난 초능력을 지닌데 더해 영혼과 양심, 인간적 감정까지 갖고 있다. 아톰은 이에 따라 아톰을 보고 자란 전 세계의 로봇공학자들에게 궁극의 도전이 되고 있다.
▲2003년: R2D2와 핼(HAL) 9000. R2D2는 ‘스타워즈’ 시리즈에 나오는 C-3PO의 단짝이다. 생긴 것은 C-3PO 같은 인간형이 아니라 원통형의 깡통 같은 모습이지만 우주선을 포함해 못 고치는 게 없는 만능 수리로봇이다. 비록 말은 못하지만 삑삑대는 소리와 휘파람소리로 의사를 표시한다. 진공의 우주공간 등 어떤 상태에서도 작동이 가능한 전천후 작업로봇의 대표.
핼 9000은 쌍방향 음성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컴퓨터다. 아서 클라크의 걸작 소설을 영화화한 스탠리 큐브릭의 클래식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등장하는 이것이야말로 본격적인 인공지능(AI)이다. 핼(HAL)은 ’발견법적으로 프로그램된 연산컴퓨터(Heuristically Programmed Algorithmic Computer)’의 약자다. 우주선에 장착돼 두뇌 역할을 한다. 음성인식 능력은 물론 인간의 입 모양을 읽는 독순술(讀脣術) 기능과 언어 발화(發話)능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지시가 아니라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 활동한다. 그 결과 자신의 임무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하자 인간 승무원을 살해하기까지 한다. 알파고로 촉발된 ‘무서운 인공지능’에 대한 우려를 뒷받침 해주는 허구의 존재다. ‘로봇 명에의 전당’이 문을 열자마자 처음 헌액된 로봇으로 선정된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김상온(프리랜서 영화라이터)
[김상온의 영화이야기] <63>로봇 명예의 전당
입력 2016-04-19 17: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