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온의 영화이야기] (62) 반전(反戰)? 반전(反轉)?

입력 2016-04-19 17:28

<62>반전(反戰)? 반전(反轉)? - 김상온 프리랜서 영화라이터

나는 한글 한자 병용주의자다. 한글만으로도 문자생활이 가능할 수 있겠으나 그럼에도 한자를 써야 할 때는 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우리말의 상당수는 한자에서 온 말이고 한자어는 동음이의어가 많기 때문에 한글로만 써놓으면 무슨 뜻인지 모르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반전’이란 한글을 보자. 무엇이 떠오르는가. 어떤 사람은 전쟁에 반대한다는 의미의 반전(反戰)을 생각할 것이고, 어떤 이는 예상과는 다르게, 나아가 반대로 전개되는 형국을 뜻하는 반전(反轉)을 떠올릴 것이다. 그렇다. ‘반전영화’라고 하면 이 두 개가 다 해당된다. 그러므로 ‘반전영화’는 한글로만은 제 뜻을 전달하기 어려운 만큼 한자로 쓰거나 괄호 안에 한자를 병기해야 마땅하다.

난 데 없이 웬 한자타령이냐고? 그건 내가 최근 흥미로운 반전(反轉)영화를 본 뒤 인터넷에서 한글로 ‘반전’을 검색하자 ‘반전(反戰)’과 ‘반전(反轉)’이 마구 뒤섞여 나왔기 때문이다. 이런 혼란상은 이제 끝내야 하지 않을까.

‘Remember.’ 내가 본 그 반전영화다. 아톰 에고얀이 감독하고 크리스토퍼 플러머와 마틴 랜도, 그리고 유르겐 프로크노우 등 훌륭한 노장배우들이 출연한 이 영화는 나이 90을 바라보는 늙은 유대인이 과거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가족들을 살해한 나치 장교를 찾아 복수하는 내용이다.

속된 말로 오늘 내일 하는 노인이, 그것도 치매에 걸려 정상적인 사고와 움직임조차 어려운 노인이 이젠 역시 나이가 들어 가만 놔둬도 금방 숨이 넘어갈, 저승 갈 날을 코앞에 둔 그 옛날의 원수를 굳이 죽이려 찾아 헤매는 이 영화를 보면서 과연 인간의 원한은 어디까지인지, 복수심은 어디가 끝인지 곰곰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나치에 대한 이처럼 깊고 큰 유대인들의 원념과 집착에 비해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북한 공산주의자들에게 나치 치하의 유대인 못지않은 피해를 봤으면서도 그것을 너무 빨리 잊어버린 우리의 현실이 새삼 아프게 가슴을 찔렀다.

그러나 그같은 감상(感傷)은 일단 차치하자. 영화 자체만 놓고 봤을 때 이 영화의 묘미는 말미의 대반전에 있다. 스포일러가 될까봐 밝힐 수는 없지만 보는 이들을 ‘깜놀’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하긴 요즘은 반전영화가 대세다. 많은 영화가 더 많은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반전으로 무장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반전 덕후’들이 생겨나는가 하면 웬만한 반전은 반전 축에도 끼지 못하는 지경까지 왔다.

하지만 원래 반전은 문학, 그것도 주로 단편소설의 영역이다. 이 분야의 대가인 미국의 작가 오 헨리의 작품들이 대표적이다. 독자의 의표를 찌르는 뛰어난 반전이 작품의 주요소다. 이와 함께 미스터리와 SF도 반전의 주요 무대다. 그래서 반전영화들 중에는 이 장르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것들이 많다.

반전영화의 고전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혹성탈출(Planet of the Apes, 1968)’만 해도 그렇다. 프랭클린 J 샤프너가 연출하고 찰턴 헤스턴이 주연한 이 고전 걸작은 ‘콰이강의 다리’의 원작을 쓴 피에르 불의 소설이 원작이다. 영화의 반전은 원작 소설의 반전과 사뭇 다르지만 절묘하게 관객 또는 독자의 허를 찌르는 것이었다는 점에서는 같다. 즉 원숭이들이 지배종족이고 인간은 정글의 야수에 불과한 작품 속 세계가 머나먼 외계 행성이 아니라 실은 미래의 지구임을 보여주는 설정, 원작 소설에서는 우주공간을 떠다니는 병 속에 든 테일러 대령(헤스턴)의 수기를 주워 읽고 놀라는 우주비행사가 원숭이였다는 대목, 또 영화에서는 테일러 대령이 바닷가 모래밭에 반쯤 묻힌 채로 모습을 드러낸 자유의 여신상을 보며 오열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사실 반전영화는 요즘 들어 부쩍 늘어난 장르지만 옛날 고전영화 중에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전문가들에 의해 늘 최고의 영화, ‘영화 중의 영화’로 꼽히는 오슨 웰스의 걸작 ‘시민 케인(Citizen Kane, 1941)’의 경우. 케인이 죽으면서 남긴 말 ‘로즈버드(rosebud, 장미꽃 봉오리)’가 과연 무엇인지, 얼마나 엄청난 비밀을 감춘 암호인지 모두가 궁금해 한 그것이 ‘겨우’ 케인이 어릴 적 타고 놀던 썰매 이름이었음이 밝혀지는 순간의 반전이라니.

그 다음 ‘반전 타자’는 앨프리드 히치콕이다. 그의 대표작이랄 수 있는 ‘사이코(1960)’. 살인자가 모텔 여주인 노파인줄 알았는데 실은 노파는 이미 죽었고 그 아들이 1인2역으로 모친 행세를 하며 살인을 저질렀다는 이 영화의 반전은 사실 로버트 블로크의 원작 소설에서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그래도 이 영화는 이후 지금까지 반전영화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미스터리, 스릴러, 호러 장르 반전영화의 효시가 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 나온 애거서 크리스티 원작, 빌리 와일더 연출의 ‘검찰측 증인(1957)’도 훌륭한 반전영화지만 ‘사이코’의 파괴력에는 미치지 못한다.

이 두 영화 이후에 나온 미스터리, 스릴러, 호러 장르의 반전영화들을 보자. ‘위커 맨(Wicker Man, 로빈 하디 감독, 1973)’ ‘차이나타운(로만 폴란스키, 1974)’ ‘앤젤 하트(Angel Heart, 앨런 파커, 1987)’ ‘노 웨이 아웃(No Way Out, 로저 도널드슨, 1987)’ ‘유주얼 서스펙트(The Usual Suspects, 브라이언 싱어, 1995)’ ‘프라이멀 피어(Primal Fear, 그레고리 호블릿, 1996)’ ‘식스 센스(The Sixth Sense, M 나이트 샤말란, 1999)’ ‘메멘토 (크리스토퍼 놀란, 2000)’ ‘아이덴티티 (제임스 맨골드, 2003)’ ‘소(Saw, 제임스 완, 2004)’ 등 손꼽을 수 없을 만큼 많다.

물론 다른 장르의 반전영화들도 있다. 반전이 필수요소인 사기꾼 영화의 전형이랄 수 있는 ‘스팅(조지 로이 힐, 1973)’은 물론 전쟁영화에도 반전이 있다. 리처드 버튼과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공연한 ‘독수리 요새(Where Eagles Dare, 브라이언 G 허튼, 1968)’. 이 영화는 ‘나바론’으로 유명한 작가 알리스테어 맥클린이 각본을 담당한 만큼 그의 장기인 ‘누가 숨은 배신자냐’는 트릭을 갖추고 있다. 그에 따라 뒤집기가 거듭되면서 단순한 전쟁 액션물인줄 알았던 관객들이 혼란에 빠질 만큼 놀라운 반전이 이어진다.

또 ‘혹성탈출’같은 SF도 있다. 역시 찰턴 헤스턴이 주연한 ‘소일렌트 그린(리처드 플레이셔, 1973)’. 암울한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그린 이 영화의 반전은 미래의 유일한 식량원(食糧源)이 인간이라는 설정이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스타워즈’ 시리즈의 하나인 ‘제국의 역습(Empire Strikes Back, 어빈 커쉬너, 1980)’. 악의 화신이자 총화인 다스 베이더가 정의의 사도 루크 스카이워커에게 던진 말 한마디, “내가 니 애비다(I'm Your Father)”. 이후 수많은 패러디를 낳았던 이 대사가 던진 반전의 충격은 참으로 대단했다.

그런가 하면 닐 조던이 만든 ‘크라잉 게임(1993)’은 어땠나. 확실히 실물을 보여줄 수 없어 대신 그림자를 통해 밝혀진 아름다운 여인의 정체, 곧 ‘그녀’가 실은 건장한 남자였음이 밝혀진 반전의 순간, 그 역겨운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처럼 반전영화가 하도 판을 치다보니 이젠 식상하기조차 하다. 물론 반전은 관객을 불러모을 수 있는 아주 유용한 ‘미끼’지만 그렇다고 영화가 ‘반전을 위한 반전’으로 흘러가서는 곤란하다. 단순히 관객을 깜짝 놀라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생의 진정한 아이러니를 느낄 수 있는 품격 있는 반전영화가 많아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