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사 선지자가 활동하고 있었을 때 아람 나라 왕 벤하닷이 사마리아성을 포위한 적이 있었다. 이들은 사마리아성으로 들어가는 보급로를 효과적으로 차단해 사마리아 성은 큰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사마리아 성의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열왕기하에서는 아주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뼈가 많아서 먹을 수 있는 살이 별로 없는 나귀 머리 하나가 은 80세겔(880g 정도)이었고, 심지어 비둘기 똥 4분의 1의 갑(부피를 재는 히브리 단위로 약 0.25ℓ)이 은 다섯 세겔(55g 정도)이나 됐다고 한다.(열왕기하 6장 25절) 도대체 비둘기 똥을 왜 사는지 모르겠는데 아마도 이렇게 표현한 것은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 우리 속담처럼 가장 가치 없어 보이는 것도 정말 비싼 값에 팔린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된다.
사마리아의 상황이 정말 심각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은 두 어머니가 자녀를 서로 잡아먹기로 했다는 이야기다. 어차피 다 죽을 바에는 자식이라도 서로 잡아먹기로 약조했던 두 어머니가 있었는데 다른 한 어머니가 약조를 지키지 않는다고 왕에게 하소연하는 이야기가 열왕기하에 기록돼 있다. 우리로서는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기록돼 있는데 그만큼 사마리아 성의 상황이 최악의 상황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순간에 이스라엘의 왕은 엘리사 선지자를 죽이겠다고 했다.(열왕기하 6장 31절) 왜 갑자기 그런 말이 튀어나왔을까? 엘리사 선지자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이 아닌데 왜 이스라엘의 왕은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사실 사마리아 성이 만난 위기의 근본적인 책임은 다른 사람이 아닌 이스라엘 왕에게 있지 않은가? 아람 나라가 공격해서 사마리아 성을 포위하고 보급로를 차단할 때 그러한 공격을 막아내야 할 책임은 사실 이스라엘 왕에게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스라엘 왕은 엘리사 선지자를 죽이겠다고 하는가?
어쩌면 그것은 희생양을 찾으려는 우리들의 습성과 일치한다. 우리들은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항상 그 문제의 원인이 어디에 있으며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따지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책임이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향해서 화풀이를 하려고 한다. 지금 이 순간에 이스라엘의 왕은 엘리사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그에게 책임을 묻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첫째로, 엘리사 선지자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책임도 없다. 사실 모든 책임은 이스라엘 왕에게 있는 것이지 엘리사 선지자에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로, 엘리사 선지자는 죽여야 할 사람이 아니라 함께 협력하며 이 난국을 헤쳐 나가야 할 아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적군이 누구며 아군이 누구인지를 분별해야 한다. 우리의 적군은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다.(에베소서 6장 11~12절)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 영적인 싸움이다. 우리를 교만하게 만들고 탐욕에 빠지게 만들며 악을 행하도록 유혹하는 마귀와 싸워야 한다. 그런데 아쉽게도 우리는 종종 적군과 싸우기보다는 아군과 싸우는 것을 선택한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움을 하러 나갈 때 다윗의 길을 가로막은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다윗의 형 엘리압이었다. 그는 다윗에게 노를 발하면서 책망했다.(사무엘상 17장 28절) 다윗은 골리앗과 싸움을 하기 전에 먼저 엘리압이라는 장애물을 만난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윗은 엘리압과 싸움을 하지 않았다. 엘리압과 싸우면서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지 않았다. 엘리압은 적군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다윗은 골리앗에게 바로 나아갔고 골리앗과 싸워서 이겼다. 이것이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나중에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 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다윗은 사울이 죽이려고 달려들 때에 사울과 싸워서 사울을 죽이려하지 않았다. 기회가 찾아왔지만 다윗은 하나님께서 기름 부은 종을 내가 어떻게 죽일 수 있겠는가 하면서 그 기회를 흘려버렸다. 왜냐하면 사울 왕은 다윗의 적군이 아니었다. 사울 왕은 함께 협력하고 힘을 합해야 하는 아군이었던 것이다. 사울 왕의 선택은 참으로 아쉬웠다. 다윗을 군대의 장관으로 삼고 다윗과 협력했더라면 사울 왕은 크나큰 유익을 얻었을 것이다. 사울과 다윗이 힘을 합했다면 이웃 블레셋을 물리치는데 큰 도움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울 왕은 다윗을 적으로 생각했고 다윗을 죽이는 일에 자신의 에너지를 모두 쏟았다. 결국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죽어가고 말았다. 힘을 합해야 하는 다윗을 죽이려했고 싸워야 할 블레셋과는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결과였을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만난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누구의 잘못 때문인가를 따지기 시작한다. 남편을 아내를 비난하고, 아내는 남편을 비난하게 되는 경우를 종종 본다. 힘들고 어려울 때일수록 서로 사랑하고 돕고 아껴서 함께 힘을 합해나가야 하는데 오히려 그런 때일수록 누구의 잘못인가를 놓고 서로 싸우며 다투기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탄이 아군과 적군을 혼동하게 하는 전략에 말려든 결과다. 우리는 이런 순간에 분명하게 기억해야 한다. 남편은 나의 아군이고 아내는 나의 아군임을 기억해야 한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날수록 서로 힘을 합해야 함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이스라엘 왕이 엘리사 선지자를 죽이려 했던 것처럼 배우자를 적군으로 생각하고 공격한다면 서로 멸망하게 될 것이다.
행복한 가정은 무엇인가? 서로가 서로를 아군으로 생각하며 부족한 것은 채워주고 연약한 것은 강하게 하며 서로 격려하는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다. 복된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우리가 함께 그리스도의 군사 된 자들임을 기억하고(빌립보서 2장 25절, 빌레몬 1장 2절) 부족한 것은 감싸주고 연약한 것은 도와주며 서로 사랑으로 격려하는 교회가 복된 교회이다. 우리는 서로 싸워야 할 원수들이 아니다.
나는 최근 서울의 어떤 교회 성도들이 보내는 편지를 받았다. 그 교회는 목사 지지파와 반대파가 서로 나뉘어져서 싸우고 있는데 자신들을 지지해달라면서 아무 상관이 없는 전국의 목회자들에게 무작위로 보낸 편지 같았다. 복잡한 상황이니까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은 쉽지 않을 것 같다. 아니 그 편지에 기록된 대로 정말 어떤 심각한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안타깝게 생각되는 것은 우리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분별하지 못하고 서로 아군끼리 싸운다는 점이다. 성경은 분명하게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악을 그냥 덮어두고 방조하자는 말도 아니다. 교회의 거룩성을 위해 교회 내에서 악은 제거되는 것이 옳다. 하지만 일단 상대측을 적군으로 규정하고 그들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물러서지 않는 전쟁을 한다면 결국 피차 멸망하게 될 것이다. 아무리 잘못한 것이 있어도 그들이 100% 악한 자들이며 반드시 제거해야 할 적군인 것만은 아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잘못을 교정하고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돕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상대를 조롱과 비난하는 자세가 아니라 마음을 같이하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나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가운데 다툼이나 허영으로 할 것이 아니라 오로지 영혼을 회복시키는 마음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빌립보서 2장 1~4절) 내가 다른 사람을 적군으로 보는지 아군으로 보는지를 확인하는 기준은 내 마음에 분노와 조롱과 교만함이 있는가 아니면 자식의 잘못을 보면서 애통해하는 어머니와 같은 마음이 있는가에 있다.
그런데 아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처럼 행동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공격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하셨다.(로마서 5장 10절) 그리고 그 십자가의 보혈 때문에 우리가 산다.
이국진 목사
대구=최일영 기자 mc102@kmib.co.kr
[목회자칼럼]대구 남부교회 이국진 목사, '아군인가? 적군인가?'
입력 2016-04-18 1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