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소련의 스타 화가 변월룡을 아시나요

입력 2016-04-17 17:59
'무용가 최승희 초상화'. 대중에게 각인된 서구적이고 화려한 이미지와 달리 사회주의적 이상을 담아 강하고 어진 어머니처럼 그렸다.
동판화 '레닌께서 우리 마을에 오셨다'. 1953년 스탈린 사후 우상화에 대한 비판이 제기된 사회분위기가 반영됐다. 레닌에 정면에 거대하게 묘사하던 방식을 탈피해 마을 주민에 둘러싸인 친근한 지도자 레닌으로 묘사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작고하기 3년 전에 그린 '금강산 소나무'. 다시 돌아가지 못한 모국에 대한 그리움이 느껴진다.
고려인 화가 변월룡(1916~1990). 연해주에서 태어난 그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구 레닌그라드)에서 미술교육을 받았다. 러시아 최고의 미술교육기관 ‘일리야 레핀 레닌그라드 회화·조각·건축 아카데미’(1764년 설립) 교수를 지내며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술의 대가로 당대 명성을 누렸다. 소련의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하는 공적 주문 그림 뿐 아니라 ‘닥터 지바고’의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등 명사들과 교유하며 그들의 초상화를 남겼다. 지금 그를 기억해야 하는 더 큰 이유는 해방 이후 평양에 파견돼 평양미술학교 재건을 진두지휘하며 북한 미술의 토대를 구축한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냉전은 1989년 종식됐다. 그럼에도 보이지 않는 장막 때문에 여전히 터부시됐던 그의 이름을 대중 앞으로 소환하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탄생 100주년을 기리는 ‘백년의 신화: 한국 근대미술 거장전’ 시리즈의 첫 번째로 ‘변월룡 전’을 마련했다.

변월룡이 소련 문화성의 지시로 평양에 파견돼 활동한 시기는 1953∼54년의 짧은 기간에 불과하다. 이 기간 평양미술학교의 커리큘럼 등 제도적 기틀을 마련했을 뿐 아니라 김용준, 문학진, 정종녀, 김주경, 배운성 등 중추적인 작가들과 어울리며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귀국 후에도 이들과 주고받은 누런 편지에는 시대를 뜨겁게 껴안았던 그들의 고민을 엿볼 수 있어 묘한 감동을 준다. 이 시기 북한의 풍경 뿐 아니라 이기영, 한설야 같은 월북 문인, 무용가 최승희, 화가 김용준 등의 초상화를 남겨 그가 북한사회에서 얼마나 귀한 대접 받았는지 짐작케 한다.

전시에선 러시아 아카데미즘과 사회주의 리얼리즘 예술이 우선 눈길을 끈다. 억척스럽게 생긴 러시아인 어촌 아낙과 농사짓는 농부들의 낙천적인 모습, ‘식민주의 족쇄를 끊어라’라는 글귀와 함께 쇠사슬을 끊는 아프리카인을 형상화한 포스터 등이 그렇다. 평양에 머물 때 그린 한국의 금강산과 시골의 풍경도 그런 연장에 있다.

그러나 사회가 변화하며 그림 세계도 바뀐다. 1953년 스탈린 사후 러시아에도 우상화 비판과 함께 개방의 물결이 있었고, 그 영향으로 그의 풍경화에도 인상주의적 요소가 강해진다.

가장 아프게 와 닿는 건 디아스포라로 살아가는 그의 내면을 엿볼 수 있는 풍경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표현한 에칭 ‘바람’은 고려인으로 살아가면서 겪는 정체성 혼란이 투영된 듯하다. 사망하기 3년 전 그린 ‘금강송’은 사무친다. 산허리 구름을 안은 늠름한 산을 배경으로 서 있는 소나무가 꿋꿋하면서도 외롭다. 모국에 대한 일편단심 그리움, 변월룡의 인생이 그러했을 것이다. 서울 덕수궁관에서 내달 8일까지.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