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2월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귀국을 둘러싸고 전두환 정권과 로널드 레이건 미국 행정부가 벌인 물밑 외교전의 내막이 17일 공개된 외교문서를 통해 드러났다. 특히 전두환 정권은 김 전 대통령의 귀국이 12대 총선과 전 전 대통령의 방미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미국과 막후교섭을 벌였지만 수포로 돌아갔다.
전두환 정권은 김 전 대통령을 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주동자로 몰아 사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국제사회의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형량을 20년으로 감형했으며 82년에는 신병치료 명목으로 형 집행정지를 내려 미국 출국을 허락했다.
3년여가 지난 85년 1월 김 전 대통령은 귀국 의사를 밝혔다. ‘조국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전두환 정권은 격노했다. 귀국 일자가 총선 나흘 전인 2월 8일이어서 국내 정세에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로 봤다. 김 전 대통령이 귀국하는 즉시 그를 재수감키로 하면서 이른바 ‘김대중 문제’를 둘러싼 한·미 양국간 외교전이 시작됐다.
85년 1월 4일 폴 월포위츠 당시 미 국무부 동아태차관보는 류병현 당시 주미대사와 면담을 갖고 “한국 정부는 (김 전 대통령) 귀국 시 재수감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김 전 대통령이) 재수감되면 미국 정부는 의회로부터 대단히 거센 압력과 언론의 성화를 면치 못할 것이며 문제의 양상이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으로선 김 전 대통령에게 쏠린 전 세계의 관심과 더불어 한·미 관계까지 신경 써야 하는 ‘진퇴양난’의 처지였다. 미국 정부는 김 전 대통령이 귀국 시기를 총선 이후로 늦추도록 설득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동시에 그해 4월 예정된 전 전 대통령의 방미까지 연계시키며 김 전 대통령을 재수감하지 않도록 전두환 정권에 압력을 넣었다.
하지만 어느 쪽도 성과가 나지 않자 미국은 전두환 정권을 더욱 압박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특히 1월22일 리처드 워커 당시 주한 미국대사가 전 전 대통령을 면담한 직후 미국 측은 더욱 강경해졌다.
클리블랜드 당시 주한 미국공사는 이튿날인 23일 면담 내용을 한국 외무부 미주국장에게 전하면서 “국무성의 1차적 반응은 대단히 실망했다는 것이다. ‘태평양계획(전 전 대통령 방미)’ 발표를 연기하는 문제를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국 측은 “전혀 이해할 수 없다”고 반발했지만 결국 한국 측은 발표 연기에 동의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전 전 대통령은 “(전 전 대통령의) 방미 후 (김 전 대통령이) 귀국한다면 재수감하지 않겠다는 생각”이라면서도 “만일 방미 전 귀국한다면 재수감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1월25일 전 전 대통령은 이원경 당시 외무부 장관을 통해 “김(김 전 대통령)이 스스로의 의사에 의해 귀국한다면 그 시점이 언제이든 받아들일 것이며, 그의 귀국과 관련해 레이건 행정부의 입장을 난처하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뜻을 굽혔다.
조성은 기자 jse130801@kmib.co.kr
김대중 귀국 둘러싼 전두환 정권과 레이건 행정부의 막후 외교전
입력 2016-04-17 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