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판소리 전도사, 한유미-에르베 페조디에 부부

입력 2016-04-17 15:24
한유미-에르베 페조디에 부부가 지난 16일(한국시간) 국립창극단의 '변강쇠 점 찍고 옹녀'가 공연된 파리 테아트르 드 라빌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국립창극단의 ‘변강쇠 점 찍고 옹녀’가 프랑스 공연예술의 중심지인 파리 테아트르 드 라빌(파리 시립극장)에서 화려한 신고식을 치렀다. 15일(한국시간)부터 나흘간 4회 공연된 이 작품에 대해 아직 평단의 반응은 나오지 않았지만 관객들은 뜨거운 환호성을 보냈다. 테아트르 드 라빌 관계자들은 “관객들의 반응으로 이번 작품의 성과를 충분히 알 수 있지 않느냐”며 국립창극단 관계자들에게 축하를 건넸다.

‘변강쇠 점 찍고 옹녀’의 프랑스 공연 성공은 한국 창극의 첫 소개, 작품의 완성도 등 여러 요인이 있지만 자막의 역할을 빼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파리에서 한국어 강사 및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는 한유미(47)-에르베 페조디에(59) 박사 부부가 공동으로 만든 자막은 이 작품의 해학과 성적 은유를 제대로 전달했다. 덕분에 판소리 특유의 발성법과 낯선 한자 단어 때문에 내용 일부가 잘 전달되지 않는 한국 관객과 달리 프랑스 관객은 자막을 통해 확실히 이해한 덕분에 더 먼저 그리고 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한유미 박사는 “자막은 대사를 100% 넣으면 관객이 전부 읽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무대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든다. 그래서 80% 정도로 내용을 압축해서 전달하는 게 중요하다”면서 “작품의 코믹하고 에로틱한 부분을 맛깔스럽게 번역할 수 있었던 데는 배우 겸 극작가 출신인 남편의 역할이 컸다”고 밝혔다.

사실 한유미-페조디에 부부는 유럽 최고의 판소리 전도사다. 흔히 판소리가 2003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으로 2002년 파리가을축제의 판소리 다섯바탕 완창 공연이 꼽힌다. 당시 호평을 받으면서 판소리 다섯 바탕은 이듬해 미국 뉴욕 링컨센터와 영국 에딘버러 국제 페스티벌에도 초청되는 등 큰 주목을 받았다. 파리가을축제 공연 당시 판소리 다섯바탕의 번역 및 자막 담당자가 한유미-페조디에 부부였다. 그리고 이 불어 자막이 워낙 잘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것을 다시 영어로 번역해 영국과 미국 공연에 사용됐다. 이자람의 ‘사천가’ ‘억척가’까지 최근 불어권에서 공연된 판소리의 번역은 거의 부부가 맡고 있다.

부부는 또한 2007년부터 프랑스인들을 대상으로 판소리 워크숍을 열고 있을 뿐만 아니라 2013년부터 파리에서 유러피언 아마추어 판소리 콘테스트 등의 프로그램으로 이뤄진 ‘K-Vox 페스티벌’을 개최하고 있다. 페조디에 박사는 판소리에서 이야기꾼 역할을 하는 ‘아니리 광대’가 되어 판소리 문법에 맞춰 프랑스어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공연도 연다. 그는 “한국 판소리는 음악성과 문학성이 매우 뛰어나다. 어디에도 없는 고유하고 독특한 장르다”면서 “최근 프랑스에서는 판소리가 많이 알려졌고 직접 배우려는 사람들도 많다. 이번에 창극을 보면서 판소리에 대해서 더 관심이 늘어난 것 같다”고 말했다.

원래 친구처럼 지냈던 부부는 판소리 번역 덕분에 평생을 함께 하는 사이가 됐다. 1997년 파리에 심리언어학 박사과정으로 유학온 그는 학위를 준비하는 한편 한국 희곡 번역에 나섰다. 좋은 번역을 위해 프랑스인과 공동작업을 하게 됐는데, 그가 바로 나중에 남편이 되는 페조디에 박사다. 1996년 판소리를 처음 들은 이후 한국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페조디에 박사는 친구인 파리가을축제 음악감독 조세핀 마르코비치에게 판소리를 초청하도록 꾸준히 권유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리고 2002년 파리가을축제에서 다섯바탕을 모두 공연하는 것이 결정된 2000년부터 부부는 번역 작업에 나섰다. 당시 판소리가 호평을 얻었던 데는 오랜 시간에 걸친 두 사람의 숨은 노력이 있었던 셈이다. 이후 판소리에 더욱 깊이 천착한 한유미-페조디에 부부는 각각 판소리와 한국 샤머니즘으로 다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유미 박사는 “판소리가 해외에서 공연됐을 때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번역의 잘못이다. 간혹 유럽 사람들이 판소리를 좋아하겠냐고 의문을 제기하는 한국 사람들이 있는데, 그동안 내 경험으로는 판소리를 제대로 접하기만 하면 누구나 그 매력에 빠진다”며 “사실 판소리만이 아니라 다른 공연도 마찬가지겠지만 번역이나 자막이 성패를 좌우하는 만큼 처음 기획 단계부터 면밀하게 준비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