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니 윌렛(29·잉글랜드)은 달력 4월10일(현지시간)에 동그라미를 그려뒀다. 아내 니콜의 출산 예정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날은 마스터스 최종일이었다. 하지만 평소 가족의 가치를 소중히 여겼던 그는 마스터스를 나가는 대신 아내의 곁을 지키기로 했다. “마스터스 출전 기회는 앞으로도 많다”고 했지만 “대회 전에 아이가 태어난다면 꼭 출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2013년 결혼한 윌렛은 지난해 첫 출전한 마스터스의 파3 콘테스트에 아내를 캐디로 대동하고 참가하기도 했다.
◇복덩이 아들
아빠의 간절한 바람을 복중의 아들이 알았을까. 아들 자카리아 제임스는 지난 달 30일 예정일보다 열흘 앞서 태어났고 윌렛은 간신히 출전 신청을 할 수 있었다. 등록 번호는 맨 마지막인 89번이었다. 그리고 디펜딩 챔피언으로 등록번호 1번인 조던 스피스(23·미국)와 대결 끝에 챔피언이 입는 그린 재킷의 주인공이 됐다. 출산한 아내의 멋진 생일(11일) 선물이기도 했다.
윌렛은 1987년 10월 성공회 교회 목사인 아버지와 수학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네 형제 중 셋째인 그는 형들에게 골프를 배웠고 한 때 아마추어 세계랭킹 1위까지 올랐었다. 지난 2008년 프로에 데뷔해 유럽프로골프투어에서 주로 활약했지만 허리 부상으로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는 최근 2년간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면서 이번 대회 이변을 예고했다. 2014년 12월 유럽투어 네드뱅크 골프 챌린지에서 우승하면서 세계랭킹 50위 이내에 진입했다. 지난해는 4대 메이저 대회와 3개 월드골프챔피언십(WGC) 대회에 출전해 존재감을 알렸다. 첫 메이저 대회인 마스터스에서는 공동 38위에 그쳤지만 이어진 WGC 매치플레이에서 강호들을 꺾고 3위를 차지했다. 브리티시오픈에서 공동 6위까지 오른 그는 지난 2월 오메가 두바이 데저트 클래식에서 우승해 유럽투어 통산 네번째 정상에 올랐다. 이번 대회 우승으로 그는 세계랭킹이 12위에서 9위로 올라섰다.
◇아, 12번홀!
마스터스 마지막 날인 11일(한국시간) 미국 조지아주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장. 디펜딩챔피언 스피스가 전반 6~9번홀까지 4홀 연속 버디를 잡는 등 전반에만 4타를 줄이며 5타 차 선두를 지켰을 때 아무도 그의 우승을 의심하지 않았다. 최연소 대회 2연패도 손에 쥔 듯 했다. 하지만 방심한 탓이었을까. 후반들어 스피스의 끔찍한 악몽이 시작됐다. 특히 11~13번홀은 악명 높은 ‘아멘 코너’였다.
스피스가 10번홀 보기를 시작으로 아멘 코너 첫 번째 홀인 11번홀(파4)에서도 보기를 범할 때까지만 해도 여유가 있어보였다. 그 사이 두 홀 앞서 플레이 하던 윌렛이 13~14번홀 연속 버디로 2타차로 좁혀왔지만 여전히 스피스의 표정은 밝았다.
12번홀은 차라리 지옥에 가까웠다. 티샷이 그린 앞 워터 해저드에 빠졌고, 1벌타 후 친 세번째 샷도 뒤땅을 치면서 물에 들어갔다. 5번째 샷은 벙커에 들어갔고, 6번 만에 그린에 볼을 올린 스피스는 무려 7타만에 홀아웃했다. 기준 타수보다 4타를 더 친 이른 바 ‘쿼드러플 보기’였다.
2011년 로리 매킬로이(북아일랜드)도 전날까지 4타 차 선두를 달리다가 최종 라운드 12번홀에서 4퍼트를 하고 더블보기를 하는 바람에 우승이 좌절됐었다. 버바 왓슨(미국)도 2013년 대회 2연패를 노렸지만 최종라운드 이 홀에서 3차례 볼을 물에 빠트리며 10타를 적어내고 고개를 떨궜다.
스피스는 “아주 힘들었던 30분이었다”면서 “앞으로 이런 경험이 다시 없기를 희망한다”며 씁쓸해했다.
이븐파 공동 5위로 출발한 윌렛은 마지막 날 보기 없이 5타를 줄이며 최종합계 5언더파 283타를 쳤다. 스피스와 리 웨스트우드(잉글랜드) 등 공동 2위를 3타 차로 따돌리고 1996년 닉 팔도 이후 잉글랜드 선수로는 20년 만에 그린 재킷의 주인공이 됐다. 유럽 출신 선수 우승도 1999년 호세 마리아 올라사발(스페인) 이후 17년만이다. 1996년 우승자 팔도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당시 마지막 날 보기없이 5타를 줄이며 그렉 노먼(호주)에게 5타차 역전 우승을 일궜다.
서완석 체육전문기자 wssuh@kmib.co.kr
가정이 소중했던 윌렛, 복덩이 아들이 가져다 준 그린 재킷
입력 2016-04-11 2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