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싱의 경제학/조지 애커로프·로버트 쉴러/RHK
자유시장경제에 대한 이 시대의 믿음은 확고하다. 2000년대 후반 이후 전 세계적으로 불평등 이슈가 제기되면서 자유시장경제에서 분배 문제가 취약하다는 지적은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다. 그렇지만 그 대안으로써 자유시장경제의 재고나 해체를 주장하는 목소리는 여전히 극소수에 불과하다.
‘피싱의 경제학’은 분배와는 다른 키워드로 자유시장경제의 문제를 조명한다. 조작이나 기만, 사기, 속임수 등을 뜻하는 ‘피싱(phishing)’이 그것이다. 자유시장경제에서 피싱의 문제는 지속적으로 거론돼 왔다. 그러나 시장에 흙탕물을 일으키는 미꾸라지 정도로 취급해온 게 사실이다. ‘피싱 경제학’은 피싱을 자유시장경제의 구조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로 규정하면서 새로운 경제학을 세우려는 야심을 보여준다.
“우리에게 자신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잘 파악하지 못하는 약점이 있는 한, 그리고 이런 약점을 들쑤시고 이용해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한, 시장은 우리의 약점을 이용할 기회를 꽉 움켜쥔다. 시장은 우리를 세밀히 관찰하고 이용한다. 자유시장은 ‘바보를 노린 피싱’을 행한다.”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별로 새로울 게 없는 주장이다. 새로운 것은 ‘바보를 노린 피싱’이 전방위적으로 일어나고 있고, 누구나 피싱을 하고, 누구나 피싱을 당한다는 데 있다. 책은 금융, 광고, 자동차, 주택, 신용카드, 식품, 제약, 술, 담배 등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벌어지는 피싱 실태를 보여준다.
“광고는 피싱이 만연하는 훌륭한 사냥터가 될 수밖에 없다.” “카드회사의 모든 노력은 바보를 노리는 피싱과 관련이 있다.” “보통 소비자의 일생에서 가장 큰 구매액을 차지하는 것이 자동차와 주택이고, 이 사실을 이용한 갖가지 피싱으로 인해 우리는 실제 치러야 할 대가보다 훨씬 높은 금액을 치르고 구입한다.” “현대 미국에서 피싱은 어느 곳에서도 강한 힘을 발휘하지만 특히 큰 힘을 발휘하는 4가지 분야는 중독을 노린 담배, 술, 약품, 도박이다.”
피싱은 포테이토칩에서도, 항공사의 좌석 등급에서도, 정치에서도 발견된다. 지금의 경제시스템에서는 속임수와 기만이 구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게 이 책의 핵심 주장이다. 다시 말해, 시장경제가 뒤틀려 버린 것을 몇몇 비도덕적인 기업과 경영자의 문제로 봐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경쟁시장에서 천성적으로 생겨날 수밖에 없는 사기와 기만의 원인은 우리에게 번영을 안겨주는 바로 그 이윤 추구의 동기이다. 이윤 추구의 동기는 모든 사람이 합리적으로 처신할 때는 건강하고 순조로운 경제를 안겨주는 한편, 반대로 바보를 노리는 피싱이라는 경제적 병리현상도 불러온다.”
이윤 추구, 자유 경쟁, 승자 독식 등을 특징으로 하는 자유시장경제는 풍요를 만들어냈지만 피싱을 낳기도 했다. 풍요와 피싱은 자유시장경제의 ‘양날의 칼’이다.
“풍요를 만들어낸 인간의 창의성은 한편으로 온갖 세일즈 기술도 만들어낸다. 자유시장은 ‘나한테 좋고 너한테도 좋은 것’을 만들어내지만 동시에 ‘나한테 좋고 너한테는 나쁜 것’도 만들어낸다. 이윤 창출이 지속되는 한 자유시장은 두 가지 일을 다한다.”
책은 마지막 장에서 ‘피싱이 그렇게 많은데 오늘날의 경제가 그럭저럭 괜찮은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표준과 규제, 감독기관 등을 만들어온 역사를 소개한다. 책은 규제와 감독기관의 역할을 피싱 경제에 대한 방어 수단으로 규정하고 열정적으로 옹호한다. 규제 철폐와 완전한 자유경제를 주장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진짜 바보만이 그런 세상에 단점이 전혀 없고 예방조치도 전혀 필요 없다고 말할 것”이라며 “정부 자체가 문제라는 새로운 스토리는 바보를 노리는 피싱이다”라고 질타한다.
지금의 경제 시스템이 불공정하고 비윤리적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쉽지만 강렬한 분석을 제시한다. 이 책을 공동 저술한 조지 애커로프(조지타운대 정책대학원 교수)와 로버트 쉴러(예일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2001년과 2013년 각각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경제학자들이다. 근래 ‘경제학의 혁명’이라는 평가와 함께 경제학계의 주류에 진입하고 있는 행동경제학을 대표하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둘은 인간의 비이성적 심리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한 ‘야성적 충동’에 이어 또 한 번 중요한 책을 선보였다. ‘피싱의 경제학’은 분배 중심의 경제학과는 또 다른 측면에서 전통적인 자유주의 경제학을 뒤흔들 만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로버트 쉴러는 올해 미국경제학회 회장으로 내정됐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
시장경제에서는 누구나 피싱을 한다
입력 2016-04-06 1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