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막바지에 쏟아지는 묻지마 공약...여전한 필리핀식 후진선거

입력 2016-04-04 15:56

2012년 대선 당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는 선거운동 마지막 날 임기 내 군 복무기간을 21개월에서 18개월로 단축하겠다는 ‘깜짝 공약’을 발표했다. 기존 공약집에는 없던 내용이었다. 이 공약은 박근혜정부가 출범한 후 중장기 과제로 돌려졌고, 아직까지도 이행되지 않고 있다.

20대 총선을 앞두고도 여야는 선거 막바지에 공약을 쏟아내고 있다. 문제는 상당수 공약이 당정 또는 당내 조율도 제대로 거치지 않는 ‘설익은’ 것으로 선거 후 폐기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게 새누리당 강봉균 선대위원장이 경제공약으로 내놓은 ‘한국판 양적완화’다. 기업구조조정을 위해 산은채권을 인수하고 주택담보대출증권도 직접 인수해 20년 장기분할상환으로 전환하는 내용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공약이 발표된 후 돈이 풀릴 것이란 막연한 기대 심리에 채권 값이 오르는 등 시장이 출렁였다.

하지만 유권자에게 배달된 선거공보에도, 새누리당 홈페이지의 정책공보집에도 한국판 양적완화 공약은 찾아볼 수 없다. 새누리당 의원 출신인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최근 한국판 양적완화 공약에 대해 “내용을 잘 모르지만 당의 공약은 아닐 것”이라고 밝혀, 충분한 숙의나 당정 협의를 거치지 않고 발표된 공약임을 시사했다.

강 위원장은 지난 3일엔 시간당 6030원인 최저임금을 4년 내에 최대 9000원으로 인상하고, 비정규직 임금을 정규직의 80%까지 끌어올리겠다는 경제 공약을 추가로 발표했다. 시간당 최저임금을 1만원으로 올리겠다는 더불어민주당의 공약을 의식한 조치로 풀이된다.

강 위원장은 최근 발표한 공약과 관련,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최고위원회의에서 위임을 받은 내용으로 당내 조율도 마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당내에선 다른 소리가 새어나온다. 새누리당 한 의원은 “방향성이 그렇다(공약내용)는 것이지 세부 내용까지는 완벽하게 조율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제1야당인 더민주도 공약 남발 행태에 큰 차이가 없다. 더민주는 3일 총선 서민금융공약을 발표하고 20년 만기 보유시 원금의 두 배를 주는 ‘재형저축국채’를 도입하고, 최근 출시된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 중심으로 금융 상품을 재편하겠다고 밝혔다. 이 공약 역시 공약집에는 들어 있지 않는 내용이다. 또 ‘기초연금 30만원 지급’ 등 선거 공보에 포함된 내용 일부도 구체적 재원확보 방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포퓰리즘’ 공약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전문가들은 지키지 못할 공약이 남발되면 국민의 정치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지고 갈등을 유발할 여지가 크다고 경고한다. 특히 정치권이 유권자 이목을 끌기 위해 선거 막판 선심성 공약을 쏟아내는 행태가 되풀이되는 것 자체가 한국 정치의 후진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이광재 사무총장은 4일 “민주주의가 후퇴했다고 평가받고 있는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 등에선 최근 선거에서 유권자 주목을 끌기 위해 유세에 마술쇼, 차력쇼를 동원한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그는 “‘묻지마 공약’이 선거 막판 남발되는 것 자체가 이들 나라와 우리의 정치 수준이 다를 게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고 지적했다.

한장희 권지혜 기자 jh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