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 한라 공격수 4인 ‘평창서 은반 위의 기적’ 꿈꾼다

입력 2016-03-31 15:54 수정 2016-03-31 16:49
1980년 2월 22일, 미국 뉴욕주 레이크플래시드. 스무 살을 갓 넘긴 24명의 미국 대학생들은 동계올림픽 아이스하키 경기장 한 가운데서 땀범벅 눈물범벅으로 서로를 껴안았다. 당시 세계 최고의 팀 소련(현 러시아) 국가대표팀을 물리친 날이다. 미국팀은 그해 금메달을 땄다. 전부 프로와 직업 아이스하키선수로 구성된 소련 캐나다 핀란드 스웨덴 체코 독일 등 쟁쟁한 팀들을 다 눌렀다.

미국팀엔 단 한명도 프로선수가 없었다. 전원 대학 1~3학년생으로 구성된 미국팀은 다른 팀의 조롱대상이었다. 미국 전문가들마저 “역대 최저 수준의 꼴등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들은 ‘은반 위의 기적(The Miracle On Ice)’를 연출했다. 기량이 안 되면 온 몸으로 퍽(puck)을 막고, 전원공격 전원수비로 한 몸처럼 똘똘 뭉쳤다.

세계 아이스하키계에서 ‘삼류’로 꼽히는 한국에도 이런 기적을 준비하는 젊은이들이 있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에 개최국 자격으로 아이스하키 경기에 나서게 될 선수들이다. 비인기종목 설움에 제대로 밥벌이조차 쉽지 않은 아이스하키 선수의 길을 ‘기쁜 마음’으로 택한 이들이다.

지난 29일 안양실내빙상장에서 사할린(러시아)과 2015-2016 아시아리그 아이스하키 챔피언전 3차전을 치른 안양 한라. 홈 3연전에서 1승2패를 기록했지만, 선수들의 패기는 하늘을 찔렀다.

“일단 한번 와 보시라니까요.”

한라의 공격수 김기성(31) 박우상(31) 신상우(29)-상훈(23) 형제는 경기장에서 만나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이구동성으로 “일단 경기장에 와서 게임을 보고나면 아이스하키의 매력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고 했다.

하키 스틱을 잡게 된 동기는 다르지만 열정의 무게는 똑같다. 김기성은 “반드시 사할린 원정에선 패배를 갚아줄 것”이라고 이를 깨물었다. 신상우는 “원정응원까지 온 러시아 팬들이 부럽더군요. 우리는 TV중계도 없어요”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한국의 아이스하키 저변은 열악하기만 하다. 7개 고교팀에 5개 대학팀(연세대·고려대·광운대·한양대·경희대). 이중 그나마 정상적인 경기가 가능한 4진까지의 선수층을 확보한 팀은 3개밖에 되지 않는다. 대학 출신 선수들 중 상위 5% 정도만 실업팀에 가는 게 현실이다. 다행히 대명그룹이 아이스하키단을 창단키로 해 한라와 하이원으로 양분되던 실업팀이 3개로 늘게 됐다.

한국 아이스하키는 1990년대 말 크게 도약할 수 있었다. 당시 한라와 석탑건설, 동원 드림스, 현대오일뱅크 등 4개 팀이 활약했다. 그러나 IMF 사태로 한라을 제외한 3개 팀이 해체됐다. 이후 한국 아이스하키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충격적인 사실이 있다. 대표팀이 2006 토리노동계올림픽과 2010년 밴쿠버동계올림픽 예선 출전을 포기한 것이다. 당시 대한아이스하키협회는 ‘본선에 오를 가능성도 없는데 예선에 출전할 필요조차 없다’는 논리를 폈다. 선수들의 기를 협회가 뿌리째 뽑은 셈이다.

한국(지난해 기준 23위)은 평창동계올림픽 아이스하키 경기 A조에 캐나다(1위), 체코(6위), 스위스(7위)와 함께 출전한다. 지금 상태로는 이들 팀에 10골 이상의 차이로 지지 않으면 다행이다.

한국 대표팀 ‘백지선호’ 주장이기도 한 박우상은 “대표팀이 평창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야 국민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다. 2002 한·일월드컵 때 ‘히딩크호’가 4강에 올랐기 때문에 축구가 국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말했다. “평창동계올림픽이 한국 아이스하키 중흥을 위한 절호의 기회”라는 말이다.

한편 ‘백지선호’는 4월 23일부터 폴란드 카토비체에서 열리는 2016 국제아이스하키연맹(IIHF) 세계선수권 디비전1 그룹A(2부리그) 대회에 출전한다. 우리 팀에는 캐나다 출신의 골리 맷 달튼(30)과 미국 출신의 수비수 에릭 리건(29·이상 한라)의 특별귀화 허가로, 총 6명의 귀화선수도 포함됐다. 한국은 1부리그 단골맴버였던 오스트리아를 비롯, 이탈리아 슬로베니아 폴란드 일본 등과 맞붙는다. 2위 이상이면 1부리그로 직행한다. 박우상은 “34년 동안 한번도 못 이긴 일본을 반드시 꺾겠다. 우리도 기적을 이룰 수 있다”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안양=글·사진 김태현 기자 taehyun@kmib.co.kr안양=글·사진 김태현 기자 tae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