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한 대밖에 없는 영국 애스턴마틴 ‘뱅퀴시 볼란테 니만 마커스’ 한정판을 몰고 다닌 사람은 신모(43)씨다. 시가 4억6000만원인 이 스포츠카는 2013년 말 애스턴마틴이 미국 뉴욕 맨해튼 대형백화점 ‘니만 마커스’와 함께 딱 10대만 내놓은 크리스마스 특별 콜라보(합작) 상품이었다. 애스턴마틴이 처음으로 차체를 탄소섬유로 덮은 차다. 지금 이 차는 압수 상태로 검찰이 위탁 보관 계약을 한 공매업체에, 차주 신씨는 구치소에 있다.
대기업 직원에서 사이버도박단 운영자로
서울경찰청 사이버안전과는 2조원대 규모의 불법 인터넷 도박사이트를 운영한 혐의(도박장 개장)로 16명을 검거하고 신씨 등 간부 5명을 구속했다고 30일 밝혔다. 신씨는 이 조직 총책이다. 그는 범죄 수익을 세탁하려고 의사 이모(31)씨를 ‘바지 병원장’으로 앉혀 일명 사무장병원을 운영한 혐의(의료법 위반)도 받고 있다. 이씨는 불구속 입건됐다.
신씨는 사이버도박 운영에 가담하기 전까지 번듯한 직장을 다녔었다.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9년부터 10년간 대기업 전자회사에서 생산직으로 일했다. 1999년 퇴사하고는 자기 사업을 비롯해 이런저런 일에 손을 대다 2000년대 초반쯤 사이버도박계에 발을 들였다. 남의 조직에서 처음 맡은 역할은 도박사이트 회원을 모집하는 중간책이었다. 이후 10년 정도 같은 일을 했지만 도박 관련 혐의로 적발된 적은 없다. 사기와 여신금융법 위반 등 다른 전과만 5범인 것으로 전해졌다. 강력범죄를 비롯한 형사 사건에 연루된 흔적도 없었다.
차근차근 일을 배운 신씨는 2013년 독립해 직접 조직을 꾸렸다. 태국에서 만난 ‘마 사장’이라는 한국인을 통해 미국에 도박사이트 서버를 구축하고, 지인들과 그 지인의 지인을 끌어들여 각각 역할을 맡겼다. 업무는 사이버머니 충전과 수익금 환전, 회원 상담, 회원 관리, 수익금 관리, 홍보, 인출 등으로 세분화했다. 믿을 만한 사람 순으로 중책을 맡겼다.
회원 기념일 챙기고 보너스 이벤트도
회원 관리와 충전·환전 같은 핵심 업무는 홍콩 마카오 중국 등 해외에 차린 사무실에서 처리했다. 신씨도 수시로 넘어가 일을 챙겼다. 한국에 있을 때는 주로 중국판 카카오톡 ‘위챗’으로 지시를 전달하고 현지 상황을 보고받았다. 해외 사무실 직원은 모두 한국인이었다.
이들은 인터넷에서 구한 개인정보를 이용해 불특정 다수에게 홍보 문자메세지를 보내 회원을 모집했다. 도박을 하다 그만둔 사람에게는 직접 전화를 걸어 다시 도박판으로 끌어들였다. 신규 회원에게는 무료 게임머니를 제공했다. 경찰은 압수수색 과정에서 휴대전화번호, 아이디, 비밀번호 등 개인정보 4850만건이 저장된 문서 1878개를 찾아냈다.
회원이 딴 돈은 필요에 따라 현금 대신 아이스크림과 피자 따위를 살 수 있는 쿠폰으로 발송하기도 했다. 내사 과정에서 경찰이 피자 쿠폰을 받아 생일 등 기념일을 맞은 회원에게는 외식상품권이나 현금을 지급했다. 특정 기간에 보너스 사이버머니를 추가 지급하는 이벤트까지 벌였다. 이렇게 공들여 관리한 회원이 1만7000명에 달했다.
대포 계좌 1189개, 2년간 2조6000억원
신씨 일당은 2013년 초부터 지난해 12월 24일까지 도박사이트를 운영해 수백억원을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도박사이트 운영에 사용한 계좌는 확인된 것만 1189개다. 모두 명의자가 제삼자인 대포 계좌다. 2013년 7월 3일~지난해 6월 24일 이들 계좌에 입금된 돈은 약 2조6000억원이다. 경찰 관계자는 “조직에서 자금 세탁을 위해 넣은 돈과 회원이 도박을 하려고 송금한 돈이 섞여 있다. 구분하긴 어렵지만 상당 금액이 후자일 것”이라고 했다.
신씨 등은 기본 수수료와 회원이 잃은 돈을 수익으로 챙겼다. 신씨는 이 돈을 ‘마 사장’과 6대 4로 나눠가졌다고 진술했다. 자기 몫의 40% 정도는 광고 책임자에게 건넸다고 한다.
수익금이 신씨 일당에게 현금으로 전달되기까지는 여러 단계를 거쳤다. 기본은 환치기 방식이다. 대포 계좌에 있는 돈을 중국 옌볜의 조선족 환전상에게 이체하면 그와 연결된 국내 환전상이 해당 금액만큼 현금을 신씨 조직원에게 건넸다. 태국 홍콩 마카오 등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는 조직원에게 돈을 전달할 때도 조선족 환전상을 통했다. 신씨는 “전화만 하면 실시간으로 이체됐고 그사이 단 한 번도 사고가 난 적이 없었다”고 경찰에 말했다.
신씨가 챙긴 돈은 최소 300억원이다. 가족이 해외에 있는 그는 이 돈으로 서울 강남과 경기 수원·용인 등지 고급 아파트나 빌라를 전세로 빌리며 3∼6개월마다 옮겨 다녔다. 수억원까지 하는 전세계약금을 전부 현금이나 수표 지불했다. 계약은 지인 명의로 했다. 전화는 ‘대포폰’만 사용했다. 신씨는 이런 전화를 쓰다 버리기를 반복하면서 100대 정도 사용했다고 한다. 경찰이 통화내역을 추적한 전화는 다른 조직원이 사용한 것까지 합쳐 58개였다.
경찰 조사에서 신씨 이름으로 된 국내 계좌나 부동산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압수된 애스턴마틴 한정판 스포츠카만은 그의 앞으로 등록돼 있었다.
도박사이트 운영 수익으로 병원까지 설립
지난해 10월 신씨는 월급 1100만원을 주는 조건으로 의사 이씨를 고용해 그의 명의로 수원에 160여평 규모의 척추질환 전문병원을 세웠다. 명목상 병원장은 이씨지만 실제 운영자는 신씨였던 것이다. 이씨는 신씨가 아는 의사에게 소개받은 사람이다. 의료법상 의료인이 아닌 사람이 의사를 대표로 내세워 의료기관을 세우면 불법이다.
신씨는 “도박이 불법이라 합법적인 사업을 해보려고 했다. 그러다 병원이 좋을 것 같았고, 내가 허리가 안 좋아 척추질환 병원을 세웠다”고 진술했다. 수원은 신씨의 주요 소재지다. 그러나 경찰은 병원 설립에 범죄수익을 세탁할 목적도 있었다고 추정한다. 신씨가 자신에게 돈이 있는데도 이씨 명의로 3억원을 대출받은 사실 등을 그 근거로 본다. 병원을 세우는 데는 인건비와 임차보증금, 인테리어 비용 등을 합쳐 약 10억원이 들어갔다.
신씨는 병원에서 수익이 거의 안 났다고 말했지만 장부에 적힌 숫자는 다른 증언을 했다. 병원은 지난해 12월 문을 연 뒤 최근까지 4개월간 하루 평균 800만원을 벌어들일 정도로 장사가 잘 됐다. 지난달 한 달 동안에만 1억5000만원 넘는 매출을 올렸다.
병원은 한동안 계속 운영된다. 영업 정지는 보건당국 소관이다. 경찰은 해당 병원이 범죄수익으로 차려진 데다 사무장병원으로 불법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건복지부에 알리고 행정처분을 의뢰해둔 상태다. 복지부는 수사나 재판 결과에 따라 해당 병원 영업을 정지시키고 이씨에게 의사자격 정지 처분을 내릴 수 있다.
신씨 전화 한 통에 14억원이 경찰 손에
신씨가 숨겨둔 범죄수익금이 얼마인지 경찰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경찰이 지금까지 특정한 금액은 현금과 부동산, 명품 시계, 외제차 등 각종 자산을 합쳐 93억5000만원이다. 이 금액만 해도 도박 수익금으로는 2011년 4월 전북 김제 마늘밭에 묻혀 있던 110억원을 찾은 뒤로 최대 금액이다.
경찰은 우선 39억7000만원 상당을 압수했다. 현금만 33억5000만원이다. 이 중 14억원은 돈이 없다고 잡아떼던 신씨가 경찰 추궁에 못 이기고 스스로 내놓은 돈이다. 구속 상태에서 경찰 수사관에게 전화 통화를 허락받은 그는 누군가를 시켜 경기도 수원의 한 공원 인적이 드문 곳에 돈을 갖다 두도록 한 뒤 경찰에 알려줬다.
경찰이 현장에 갔을 때 돈은 5만권으로 종이상자 2개에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고 한다. 장소는 화장실 같은 건물 안은 아니지만 천장이 있어 비가 와도 물건이 젖지 않을 만한 곳이었다고 경찰은 설명했다. 경찰 관계자는 “신씨가 범죄수익금을 임의제출 형식으로 내놓은 것인데 이런 경우는 우리도 처음이라 황당했다”고 말했다.
나머지 현금은 신씨와 간부급 조직원의 거주지를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확보했다. 5만원 돈다발이 가방이나 금고에 들어 있었다고 한다. 경찰은 강남 아파트 전세계약 만료로 반납된 보증금 14억원도 압수했다. 이 돈은 신씨의 인척이 보관하고 있었다.
상자 속 14억원은 어디서 왔을까
상자로 배달된 14억원에 대해 신씨는 “국내에서 갖고 있는 전부”라며 “국가에 반납하고 새롭게 태어나고 싶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어디에 보관했던 돈인지, 누가 가져왔는지 등에 대해서는 진술을 거부했다. 그는 “과거에는 땅에도 묻었었는데 그랬더니 썩고 냄새가 나더라. 그래서 지금은 다른 곳에 보관하는데 어딘지는 말하지 않겠다”고 했다. 경찰은 대포 계좌들을 확인했지만 14억원에 준하는 돈이 한꺼번에 출금된 기록은 없었다.
14억원이 어디서 나왔는지 확인하기 전까지 “이 돈이 다”라는 신씨 말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그 출처는 신씨가 구속 상태에서 누구에게 전화했는지, 돈을 갖다 놓은 사람은 누군지, 그는 돈을 어디서 가져왔는지 등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추적할 수 있다. 신씨가 입을 열지 않아도 그가 사용했던 전화의 통화내역, 돈이 놓여 있던 장소 일대 CCTV 녹화영상 등을 분석하는 방법이 있다.
경찰은 신씨가 돈을 모두 내놨을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면서도 14억원의 출처에 대해 강제 수사를 벌이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경찰청 사이버안전과 관계자는 “임의 제출은 자발성이 전제되는 것인데, 범죄수익 환수라는 목적을 달성했다고 해서 말을 바꾸고 그에 대한 강제 수사를 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임의 제출을 했는데도 강제 수사를 하면 앞으로 피의자들이 수사에 협조하지 않는 상황을 우려하는 듯도 했다.
일각에는 경찰과 검찰이 신씨와 일종의 거래를 한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범죄수익을 최대한 환수해야 하는 수사기관 입장에서 신씨에게 돈을 더 내놓도록 하는 대신 출처는 불문에 붙이기로 약속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경찰이 ‘이 정도 받아냈으면 됐다’는 생각을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경찰 “수사 아직 안 끝났다”
신씨가 범죄수익을 토해내게 한 방법은 ‘거래’가 아니라 ‘압박’이라고 경찰은 강조한다. 경찰 관계자는 “사무실로 의심되는 장소와 거주지 등 10곳에 대한 압수수색을 벌였다. 그렇게 현장에서 찾은 돈과 100명 가까이 되는 용의자 사진 등으로 추궁하고 또 추궁했다. 신씨는 거기에 자백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수사는 아직 종결된 게 아니다. 추적 중인 공범들을 추가로 검거하면 은닉 자금 추적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했다.
신씨가 털어놓은 해외 은닉 자금은 27억원 규모다. 현지 화폐와 카지노칩 형태로 지인에게 맡겨놨다고 한다. 카지노에서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칩에는 GPS(위치 확인 시스템)가 달려 있어 위치 추적이 가능하다. 신씨는 이 자금도 제출하기로 했다. 경찰은 환수 절차를 위해 해당 국가에 공조를 요청했다. 부동산에 묶여 있는 26억8000만원에 대해서는 몰수보전을 신청했다. 서울 강남과 용인 수지, 수원 권선 등 수도권 아파트 5곳의 전세보증금과 수원 척추 병원의 임차보증금이다. 경찰은 이들 자금 환수와 공범 검거에 주력하고 있다.
강창욱 기자 kcw@kmib.co.kr
전화 한 통에 14억원이 배달됐다
입력 2016-03-31 0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