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류 '분노하지 않는 일본에 분노"

입력 2016-03-30 17:54

무라카미 류 장편 소설, 올드 테러리스트





무시무시한, 그러나 고개가 끄덕여지는 상상이다. ‘보수 할배들’의 반란이라니.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 무라카미 류가 그런 엉뚱한 상상을 신작 장편 ‘올드 테러리스트’(기파랑 출판사)로 풀어냈다. 일본에서도 노인은 약자이며 경시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전사 집단처럼 테러를 불사하며 일본 사회를 개조하기 위해 일어선다는 내용이다.

때는 동일본대지진으로부터 7년, 도쿄올림픽까지 2년이 남은 2018년. 직장도, 가족도, 자존감도 잃고 노숙자처럼 살아가는 삼류 주간지 프리랜서 기자 출신의 54세 세키구치가 화자이자 주인공이다. 그에게 어느 날 전 직장 상사로부터 테러 제보 사건을 취재해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이후 세키구치는 보이지 않는 끈에 조종당하듯 일본 NHK 공영방송, 상가 앞, 유명 아이돌 그룹, 원자력발전소 등에서의 테러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범인은 ‘마음의 병’을 지닌 젊은이들. 언뜻 그들의 충동적인 범행으로 보이지만 하나하나 실마리를 좇아가다보면 70대에서 90대까지의 의문의 노인집단이 배후에 있다. 만주국 출신을 자처하는 이들 노인집단은 직접 궐기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쓰인 독일제 88식 탱크로 원자력 발전소를 공격한다는 황당한 계획까지 세운다. 그들의 테러는 시종 성공했다. 하지만 마지막 원자력발전소 폭파 기도 사건에서는 일본 정부가 주일미군에 지원 요청을 하면서 예기치 않은 복병을 만나 실패하게 된다.

노인들은 왜 궐기했을까. 무라카미는 작가의 말을 통해 “그 나이의 사람들은 어떤 형태로든 전쟁을 체험했고, 식량난 시대를 살았다. 대체로 죽임을 당하지도 않았고, 병으로 죽거나 자살하지도 않았다. 자리보전이나 하고 누워 있지도 않으며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고 느꼈다. 그들 중에서 경제적으로 성공하고 사회적으로 리스펙트(존경)받거나 극한 상황도 체험한 사람들이 의분을 느껴 네트워크를 만들고, 가지고 있는 힘을 다 짜내어 일어선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 상상이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근저에는 분노할 줄 모르는 일본에 대한 비판이 깔려 있다. 소설 속에서 노인들이 요즘 젊은층의 열등화 현상을 언급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작가는 경제, 전쟁, 히키코모리(자폐아), 학교문제 등 작가가 천착해온 사회적 모티브의 연장이다. 특히 전작 ‘희망의 나라 엑소더스’(2000년 발표)와 맥락이 비슷하다. 전작에서 일본사회를 ‘천천히 죽어가는 환자’로 표현한점, 주인공 격인 화자의 이름도 직업이 같은 점도 그렇다. 다만 ‘희망의…’에서는 현대 일본 사회의 절망과 함께 새로운 나라에 대한 희망을 다뤘다면 이번 소설에서는 출구가 없는 폐색이 상황이 더 짙다.

소설은 553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장(章)을 나누지도 않고 소제목마저 달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야기꾼 같은 입담, 추리소설적 요소 등이 지루함을 느낄 새 없이 끝까지 읽게 만든다. 문체 미학에 빠진 한국 소설에서는 볼 수 없는 이야기의 힘이 놀랍다. 이동주 옮김.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