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씨는 2014년 1월부터 지난 17일까지 모두 89차례나 남의 집에 들어가서 물건을 훔쳤다. 중간에 인기척이 느껴지면 도망쳤다. 그는 주로 집안 내부에 있는 귀금속을 훔쳤는데 지금까지 훔친 물건만 1억500만원어치이다.
그는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과 신길동, 구로구 가리봉동 등 주로 다세대주택이 밀집해 있는 동네를 노렸다. 다세대주택은 대문이 열려있어 접근하기 쉬웠고, 개인용 CCTV는 설치되지 않은 곳이 많았다. 지문을 남기지 않기 위해 장갑을 착용했고 발자국을 남기지 않기 위해 창밖에서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범행 수법도 계속 발전했다. 처음에는 빈 집의 창문을 열고 들어갔지만 나중엔 휴대용 파이프 절단기를 이용해 방범창을 뜯어내기까지 했다. 사용하던 파이프 절단기에서 소리가 나자 소리가 적게 나는 절단기로 바꿨다. 드라이버 등 각종 공구류와 손전등도 가지고 다녔다.
이씨의 치밀한 범행에 경찰도 상당히 고전했다. 절도 신고는 계속 접수됐는데 이씨가 흔적을 남기지 않아 도무지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경찰은 다세대주택 밀집 지역에서 같은 수법의 절도사건이 계속 발생하자 범죄 현장 주변에서 개인용 CCTV 60개, 방범·주차단속용 CCTV 100개 등을 확인했다. 빨리감기를 하면서 점검했지만 700시간이 넘는 CCTV 영상은 확인하는데만 2주나 걸렸다. 경찰은 주변을 반복해서 돌아다니는 사람을 확인해 용의자를 40명까지 압축했다.
이 용의자 중에는 지난해 11월 남의 집에 들어가려다 인기척을 느끼고 급하게 달아난 사람과 비슷한 모습의 사람이 있었다. 당시 주변에 주차돼있던 차량의 블랙박스 영상에는 골목길을 급하게 뛰어가던 한 남성의 모습이 찍혀있었다. 경찰은 이 남성을 용의자로 보고 동선 파악, 교통카드 사용 내역 분석 등을 통해 인적사항을 특정했다.
잠복근무를 하던 경찰은 양천구 신월동 이씨의 집 근처에서 이씨를 검거했다. 범행을 부인하던 이씨는 경찰이 CCTV 영상을 증거로 제시하자 범행을 인정했다. 경찰은 이씨를 검거한 뒤 3일 동안 이씨와 함께 이씨가 범행을 저질렀던 곳을 확인했다. 그 동안 신고가 접수된 곳을 확인했고, 이씨도 자신이 범행을 저지르다 미수에 그친 곳을 털어놨다. 이씨는 정확한 주소를 기억하진 못했지만 범행 장소를 대부분 기억하고 있었다. 절도범들은 한번 범행을 저지른 곳은 피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경찰과 이씨가 확인한 곳이 모두 89곳이다.
경찰 조사에서 이씨는 “다시는 범행을 저지르지 않겠다”며 모든 범행을 자백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서울 영등포경찰서는 상습절도 혐의로 이씨를 구속했다고 30일 밝혔다. 훔친 물건임을 알고도 이를 구매한 장물업자 현모(50)씨와 하모(45)씨도 장물취득 혐의로 불구속 입건됐다.
김판 기자 p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