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의 야구.’ 친구 손에 이끌려 끼어본 글러브와 야구 배트는 인생을 바꿔놓았다. 9살 소년의 키는 또래보다 훨씬 컸다. 잘 사는 집 자식처럼 보일 정도였다. 늘 웃는 얼굴에 그림자라곤 없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세 살 때 아버지는 사고로 숨졌다. 어머니는 세 살 터울 형제을 놔두고 재가했다. 부산 수영 팔도시장 좌판 채소장사를 하는 할머니 손에 맡겨져 자랐다. 형제는 밤이면 팔도시장으로 가 할머니의 리어카를 같이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겨울에 되면 연탄 살 돈이 아까워 단칸방에서 서로의 체온을 의지한 채 추위를 이겼다.
수영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소년은 학교 야구부가 운동장에서 훈련하는 모습을 매일 먼발치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야구부에는 같은 반 친구가 있었다. 어느 날 그 친구가 소년을 불렀다.
“같이 야구하자!” 그렇게 생전 처음 야구를 해봤다. 집에 돌아온 소년은 할머니를 졸랐다, 야구가 하고 싶다고. 할머니는 손자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하지 못했다. 그날부터 소년은 수영초등학교 야구부원이 됐다.
이대호(34). 그는 아직도 그 시절 먹던 김치죽 맛을 잊지 못한다. 김치 한 줄기에 쌀 한줌을 넣어 끓인 그 음식의 맛을 말이다. 이대호를 이끈 친구는 바로 미국 프로야구(MLB) 텍사스 레인저스 부동의 2번타자 추신수다.
할머니는 없는 살림에도 손자 뒷바라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쌍가락지를 전당포에 맡기고 찾기를 반복하며 야구용품을 사줬다. 할머니의 희생을 업고 이대호는 이를 악물었다. 반항기 가득해야 할 중·고교 시절 그는 삐뚤어질 틈도 없었다.
야구 명문고인 경남고에 진학해 1998년 청룡기와 봉황기 우승을 차지했고, 프로야구 스카우터들이 주목하는 유망주가 됐다. 그런데 청천벽력이 날아왔다. 엄마보다도, 아빠보다도 더 그를 아껴주던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이다. 귓가에는 ‘우리 야구선수, 우리 야구선수’하고 부르던 할머니 음성이 떠나지 않았다. 형과 함께 삶을 꾸려야 하는 소년 가장이 됐다.
이대호는 할머니 영정 앞에서 결심했다, ‘야구로 내 인생을 최고로 만들겠다’고.
피나는 노력으로 고교 최고 투수로 성장한 그를 2001년 고향 팀 롯데 자이언츠가 2차 1라운드에 지명했다. 계약금이 2억1000만원이나 됐다.
그런데 또 고난이 찾아왔다. 2001년 동계훈련에서 어깨를 다쳐 투수의 꿈을 접어야했다. 타자로 전향하자 이번엔 백인천 당시 롯데 감독이 살빼기를 강요했다. 그라운드와 계단에서 쪼그려 뛰기를 시켰고, 이대호는 무리한 훈련 탓에 왼쪽 무릎이 파열됐다. 1군과 2군을 오락가락 하는 ‘그저 그런 선수’로 전락했다.
그때도 이대호는 할머니를 생각했다. 아무리 삶이 고단해도 늘 웃던 할머니 얼굴을 떠올리며 웃었다. 그리고 또 손바닥이 다 벗겨지도록 배트를 휘둘렀다. 2004년부터 2년 연속 20홈런을 터뜨리며 리그 정상급 타자로 발돋움한 뒤 2010년에는 타격 7관왕에 9경기 연속 홈런이라는 세계 신기록을 작성했다.
그는 안주하지 않았다. 2012년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했고, 지난해 일본시리즈 최우수선수(MVP)로 뽑혔다. 팀은 그에게 올해 연봉 40억원 이상을 주겠다고 잡았다. 이대호는 뿌리쳤다. 30대 중반에 들어선 그가 MLB 진출을 선언했다. 시애틀 매리너스와의 마이너리그 계약이었음에도 받아들였다.
한 달 간의 스프링캠프. 조금만 못해도 마이너리그행이나 방출될지 모르는 위기를 이기고 이대호는 매리너스의 개막 25인 로스터에 결국 들어갔다. 9살 소년의 꿈은 이제 열흘 뒷면 이뤄지게 된다. 194㎝ 거구인 이대호의 가슴엔 아직도 작은 키의 할머니가 있다. 안타 하나, 홈런 한 개, 수비 파인플레이 하나에도 그는 그런 가슴을 다 바칠 태세다. 4월5일 이대호는 ‘영원한 친구’ 추신수의 팀 텍사스 레인저스와 개막전을 치른다.
모규엽 기자 hirte@kmib.co.kr
이대호의 가슴엔 아직도 할머니가 있다
입력 2016-03-28 17:04 수정 2016-03-28 2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