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우환의식(憂患意識)을 갖고 있습니까?”
흔히들 ‘우환’이라고 하면 걱정거리를 떠올린다. 그런데 그런 걱정거리에다 ‘의식’이라는 말을 붙이다니, ‘우환의식’이라는 말이 기이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중국을 비롯하여 동양사상에서 말하는 ‘우환의식’은 유교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른바 ‘성인(聖人)’이나 ‘군자(君子)’라 불리는 지식인 혹은 지도자라면 마땅히 갖춰야할 덕목으로 여겨져 왔고, 그런 인식은 시진핑(習近平) 시대인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여기서 말하는 ‘우환의식’은 ‘개인의 사사로운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사회와 대의를 염려하고 그 염려되는 바를 미리 대비하고자 하는 책임의식’으로 그것이 점점 커지면 ‘비천민인(悲天憫人: 사회와 백성에 대해 슬픔과 연민을 품음)’에까지 이르게 된다고 보았다. 덧붙여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을 참지식인이라고 여겼다.
[청년기고] 지식인의 우환의식(憂患意識)
차은정(32)
- 중앙대학교 대학원 중국지역학과 박사 수료
- 한국여성정치연구소 객원연구원
중국의 문학·역사·철학에는 중국 지식인들이 저마다의 가슴에 품었을 ‘우환의식’이 고스란히 가로질러온 흔적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특히 난세나 사회적 격변기라고 평가되는 시기에는 그 흔적이 더욱 두드러진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격변의 시대에 봉건왕조의 몰락과 서구열강 앞에 힘없이 무릎 꿇은 중국의 맨얼굴을 마주하게 된 ‘노신(魯迅)’은 외침(吶唅)이라는 소설집을 쓴다. 그리고 이 소설집을 쓰게 된 동기를 자서(自序)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가령 말일세, 쇠로 만든 방이 하나 있다고 하세. 창문이라곤 없고 절대 부술 수도 없어. 그 안엔 수많은 사람이 깊이 잠들어 있네. 머지않아 모두 숨이 막혀 죽겠지. 허나 혼수상태에서 죽는 것이니 죽음의 비애 따위는 느끼지 못할 걸세. 그런데 지금 자네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의식이 붙어 있는 몇몇이라도 깨운다고 하세. 그러면 이 불행한 이들이 가망 없는 임종의 고통을 겪게 될 텐데, 자넨 그들에게 미안하지 않겠나?”
“그래도 몇몇이라도 깨어난다면 그 쇠로 된 방을 부술 희망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 나는 비록 내 나름의 확신은 가지고 있었지만, 희망에 대해 말하는데 차마 그걸 말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희망이라는 것은 미래를 향하는 것이므로, 반드시 없다고 하는 내 확신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는 그의 주장을 꺾을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노신(魯迅), 외침(吶唅), 자서(自序) 중에서-
읽는 동안 숨이 턱턱 막혀오는 느낌이다. 노신이 말하고 있는 ‘쇠로 된 방’은 당시의 답답한 중국의 현실이었고, ‘깊이 잠든 사람들’은 당시의 상황을 타개해볼 생각조차하고 있지 못한 중국의 인민들이다.
우리의 현실을 돌이켜본다. ‘서구의 열강이 쳐들어오는 난세’는 아니다. 하지만 불안과 공포를 느낄만한 ‘위기’에서 비롯된 ‘쇠로 만든 방’ 도처에 깔려있지 않은가. 아니 탈출하더라도 되풀이해서 갇히고야 마는 지경은 아닌지 의구심이 드는 요즈음이다.
이런 의구심이 강하게 밀려오자 ‘침묵’이 아닌 ‘외침’으로 우리를 깨워줄 사람은 어디 있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리게 된다.
이 시대의 지식인이라고 자처하는, 혹은 타인들에 의해 지식인이라고 불리는 이들에게 다시 한 번 묻는다.
“당신은 지식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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