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이프는 갔지만 그의 축구는 살아 숨쉰다

입력 2016-03-25 14:32

‘플라잉 더치맨’ 요한 크루이프(1947년 4월 25일~2016년 3월 24일). 그가 떠난 날 네덜란드 곳곳에 조기가 걸렸다. 세계 축구계도 슬픔에 잠겼다. 네덜란드 빌럼 알렉산더르 국왕은 “네덜란드 축구의 진정한 아이콘”이라며 슬픔을 표했고, ‘축구 황제’ 펠레는 “위대한 분을 잃었다. 그는 훌륭한 선수이자 감독이었고, 세계 축구계에 중요한 전통을 남겼다”고 추모했다.

크루이프는 지난해 10월 폐암 선고를 받았다. 얼마 전까지 “폐암과의 대결에서 2대 0으로 앞서 있다”고 웃었지만 결국 병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 크루이프는 선수로서, 감독으로서 현대 축구에 혁명을 일으킨 인물이다.

크루이프는 수비를 등지고 돌아서 제치는 기술인 ‘크루이프 턴’으로 유명했다. 공격부터 수비까지 거의 모든 포지션에서 스페셜리스트에 가까운 완벽한 경기력을 뽐냈다. 한 축구 평론가는 “마치 경기장에 11명의 크루이프가 있는 듯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단지 기술만 좋은 선수는 아니었다. 세련되고 지능적인 플레이메이커였다. 전술 이해에서도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했다. 리누스 미헬스 감독의 ‘토털 사커’는 체력과 전술 이해도가 뛰어난 크루이프가 있었기에 완성될 수 있었다.

골초에다 게으른 천재였던 크루이프는 1965년 아약스(네덜란드)에서 미헬스 감독을 만나 축구에 눈을 떴다. 미헬스 감독의 야전사령관으로, 1972년 아약스(네덜란드)의 5관왕을 이끌었다. 전원이 공격과 수비에 가담하는 ‘토털 사커’는 네덜란드리그인 에레데비지에와 네덜란드축구협회(KNVB)컵, 유러피언컵(유럽축구 챔피언스리그 전신), 유럽축구연맹(UEFA) 슈퍼컵, 인터컨티넨털컵(클럽월드컵 전신)에서 맹위를 떨쳤다.

1973년 여름 아약스를 떠나 스승 미헬스 감독이 있는 FC 바르셀로나(스페인)로 갔다. 바르셀로나의 황금기를 이끈 크루이프는 세계 최초로 1971년, 1973년, 1974년 세 차례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1974년엔 네덜란드 국가대표로 발탁돼 서독월드컵에서 준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당시 네덜란드는 2라운드에서 아르헨티나를 4대 0, 동독을 2대 0, 브라질을 2대 0으로 누르고 결승에 올랐으나 프란츠 베켄바워가 버티고 있던 서독에 1대 2로 패했다.

크루이프의 천재성은 선수 은퇴 후에 더 빛났다. 1983-1984 시즌 페예노르트(네덜란드)에서 선수생활을 마감한 그는 1985-1986 시즌 아약스 사령탑에 올랐다. 그 시즌 아약스는 KNVB컵을 차지했다. 그는 1988-1989 시즌 바르셀로나 감독으로 취임해 미카엘 라우드럽과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로날드 쿠만, 펩 과르디올라, 호마리우, 게오르게 하지 등으로 환상의 팀을 만들었다. 그리고 팀 체질을 힘이 아닌 기술 중심의 ‘두뇌 축구’로 확 바꿨다. 바르셀로나 축구를 ‘크루이피즘’이라고 부르고, 스페인 ‘티키타카’를 ‘크루이프의 산물’이라 부르는 이유다. 크루이프는 바르셀로나에서 8시즌 동안 리그 4회, 코파 델 레이 1회, 유러피언컵 1회, 컵위너스컵 1회 우승 등을 이끌었다.

“나의 팀에선 골키퍼가 첫 번째 공격수요, 스트라이커가 첫 번째 수비수다.”, “공을 가지고 있을 때 경기장을 가능한 넓게 사용하고 공을 갖고 있지 않을 땐 운동장을 가능한 좁게 사용하라.”

1990년대에 이미 그가 한 말이다. 현대축구의 맥을 정확히 짚었다. 크루이프는 떠났지만 그의 축구는 여전히 그라운드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김태현 기자 tae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