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축구영웅 요한 크루이프가 타계했다. 그의 나이 68세였다. 그의 타계 소식이 전해진 24일(현지시간) 네덜란드 집집마다 조기가 결렸다. 안개 낀 암스테르담의 날씨처럼 슬픔이 나라 전체를 감쌌다. 네덜란드 빌럼 알렉산더르 국왕은 “네덜란드는 유일무이하고 너그러웠던 체육인을 잃었다”며 “그는 네덜란드 축구의 진정한 아이콘”이라고 아쉬워했다. 네덜란드 축구협회는 26일 암스테르담에서 열리는 네덜란드와 프랑스 평가전에서 전반 14분 경기를 잠시 멈추고 크루이프를 추모하기로 했다. ‘14’는 그의 등번호다.
자신의 이름을 딴 축구 기술을 갖고 있는 선수가 몇이나 될까. ‘크루이프턴’의 창시자 크루이프는 네덜란드를 넘어 전 세계가 사랑한 축구선수였다. 축구 레전드 세 명을 꼽으라고 하면 펠레, 마라도나 그리고 크루이프를 뽑는다. 펠레가 브라질을 이끌고 10년간 세계를 장악했고 마라도나가 혼자서 월드컵을 지배했다면 크루이프는 축구계의 ‘혁명가’였다. 그는 그가 선수로 뛰던 시절, 정해져 있던 축구의 모든 법칙을 거부했다.
크루이프 이름 뒤에 늘 따라붙는 수식어가 있다. ‘토털 사커의 창시자’ 크루이프는 리누스 미헬스 감독이 구상한 토털 사커를 그라운드에서 가장 완벽하게 구현한 인물이다. 혹자는 크루이프를 가리켜 ‘축구 천재’라고 말한다. 공격부터 수비까지 거의 모든 포지션에서 스페셜리스트에 가까운 완벽한 경기력을 뽐냈기 때문이다. 한 축구 평론가는 크루이프의 움직임을 보고 “마치 경기장에 11명의 크루이프가 있는 듯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전원 공격 전원 수비’라는 토털 사커가 세계 축구사를 뒤흔들 수 있었던 것은 이를 구현해줄 수 있는 크루이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사실 리누스 감독의 토털 사커는 시도할 당시 워낙 전례가 없던 전술인 만큼 상당한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특히 선수들은 그라운드 전체를 뛰어다녀야 하는 판에 체력적으로 부침을 겪었다. 그런데 유독 크루이프만 멀쩡했다. 그는 “토털 사커는 체력이 아니라 테크닉과 공간에 대한 전술이다. 그런 면에서 체력을 아끼는 전술”이라고 봤다.
그의 천재성은 선수 은퇴 뒤에 더욱 도드라졌다. 현재 FC바르셀로나 축구 철학의 근간도 크루이프로부터 시작됐다. 그는 1988년 바르셀로나 감독으로 부임해 팀을 재건했다. 당시에도 존재했던 ‘라 마시아’를 신체조건 위주가 아닌 기술과 능력 위주로 바꿨고 ‘두뇌 축구’를 가르쳤다. 바르셀로나 축구를 ‘크루이피즘’이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토털 사커는 기술보단 머리를 쓰는 축구다” 그가 늘 주장했던 말이다. 그는 “선수들이 생각 없이 움직이는 듯 보이지만, 실젠 톱니바퀴처럼 조직적으로 움직이기에 훨씬 더 강한 공격력을 발휘할 수 있다. 선수 전원이 경기 흐름을 파악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했다.
크루이프가 바르셀로나 감독 시절 펩 과르디올라를 가르쳤고 펩은 크루이프의 축구 철학을 흡수해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펩은 사실 유스 시절 미드필더로는 피지컬이 부족하는 평가로 17세까지 바르셀로나 3군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테크닉과 축구 센스를 눈여겨본 크루이프가 1군으로 승격시켰고 팀의 핵심이 됐다. 펩은 은퇴 후 2009년 바르셀로나 감독으로 부임했고 크루이프로부터 흡수한 축구 철학을 바탕으로 트레블을 달성한다.
“나의 팀에서는 골키퍼가 첫 번째 공격수고, 스트라이커가 첫 번째 수비수다” “공을 가지고 있을 때는 경기장을 가능한 넓게 사용하고 공을 갖고 있지 않을 때에는 운동장을 가능한 좁게 사용해라” 90년대 이미 크루이프가 했던 말들이다. 현대 축구를 설명하는 글이라 해도 손색없다. 그의 삶은 마감했지만 그의 축구는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
'크루이피즘' 두뇌 축구 외쳤던 크루이프가 남긴 향기
입력 2016-03-25 1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