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정재국 국립국악원 정악단 예술감독 "정악도 시대에 맞는 변화가 필요해요"

입력 2016-03-22 17:15 수정 2016-03-22 17:57

국악은 크게 궁중에서 쓰이던 정악(正樂)과 민중 사이에서 유행했던 민속악으로 나뉜다. 장단이 다양하고 흥겨운 민속악에 비해 궁중 연회나 제례 등 의식음악으로 쓰인 정악은 기품있고 바른 음악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느리며 감정의 표현이 절제돼 있다. 그래서 일반 관객에게 다소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국립국악원 정악단이 대한제국 이후 100여년간 원형 그대로 유지해온 정악에 변화를 줄 예정이다. 오는 25~26일 국립국악원 예악당 무대에 오르는 ‘정악, 새로움을 더하다’는 의식 음악인 정악의 기능적 목적을 넘어 현대 관객을 찾아 예술 음악으로서 새 옷을 입은 것이다. 이를 위해 피리 위주의 합주곡을 현악과 타악 등의 비율을 높힌 현대적인 관현악 편성의 합주곡으로 바꿨다. 그리고 가곡은 주로 독창이나 남녀창으로 불리던 것을 최대 30명이 함께 부르는 중창과 합창으로 구성해 선보인다.

정악에 새로운 지평을 연 것은 정재국(74) 국립국악원 정악단 예술감독이다. 중요무형문화재 46호 피리 정악 및 대취타 보유자인 그는 정악의 정통성을 대표하는 인물로 국립국악원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냈다. 1966년 입단한 그는 1998년~2007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로 보낸 10년을 제외하면 국립국악원 소속이었다. 정년을 마친 뒤에도 원로사범으로 활약했다. 예술감독도 1996~1998년에 이어 2014년부터 두 번째 역임하고 있다. 오는 5월 예술감독을 퇴임하는 그에게 이번 공연은 국립국악원에서의 마지막 무대로 후배들에게 정악의 미래에 대한 과제를 남긴 셈이다.

21일 국립국악원에서 만난 그는 “정악이 그동안 원형 그대로 보존하는데 치중해 왔지만 이제는 시대에 맞게 변화를 줄 필요가 있다. 이번 공연은 미래의 정악을 만드는 기초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공연 준비가 수월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그가 처음 의견을 냈을 때 단원들의 반대가 적지 않았다. 그는 “불안해 하는 단원들에게 ‘우리가 선조들이 만든 김장김치를 다 먹었으니 이제 새로 담가 채워야 한다’고 설득했다”면서 “정악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에 대해 그동안 누구도 엄두를 내지 못했다. 내가 남들이 인정하는 인간문화재인데다 정악을 가장 오랫동안 해 왔기 때문에 이번 작업에 나설 수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일제 강점기 정악의 맥을 이어온 ‘이왕직 아악부’ 출신 스승들에게 배운 마지막 세대다. 그리고 그 전통을 후진에게 이어준 고리 역할을 해왔다. 그가 직접 피리를 가르쳐 키워낸 제자만 180여명이다. 국악평론가 윤중강이 그를 가리켜 ‘악황(樂皇)’이라고 할 만큼 국악계의 존경을 받는 그가 평생 정악의 외길을 걷게 된 것은 가난 때문이었다. 6.25 직후 한때 고아원에 맡겨질 만큼 집안 형편이 어려웠던 그는 1956년 14살 때 학비를 받지 않는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현재 국악고의 전신) 2기생으로 들어갔다. 그는 “국악에 대해 아는 것 하나 없었지만 월사금이 무료란 말에 국악사양성소를 지원했다. 당시 경쟁도 상당히 치열했다”면서 “수험생들이 노래로 시험을 치렀는데, 이탈리아 칸초네 ‘산타루치아’를 부른 내가 선생님들 눈에 띈 것 같다”고 웃었다.

국악사양성소에서 그는 평생을 함께 할 피리의 매력에 빠졌다. 그는 “학생들은 가야금, 거문고, 해금, 피리, 대금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 했다. 당시 가장 인기있는 악기는 가야금이었지만 나는 피리에 끌렸다”면서 “내가 어릴 때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지 인간의 희로애락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피리 소리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국악사양성소를 졸업하고 간 군대는 그에게 다양한 세상을 만날 기회를 줬다. 당시 군악병으로 배속된 그는 훗날 연예계와 민속악의 대가가 되는 코미디언 이주일, 대금주자 이생강(중요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산조 예능보유자)과 만나게 됐다. 군에서 신나는 음악을 연주해야 했던 만큼 그는 팝송과 가요를 피리로 불었고, 이주일은 그를 ‘피리의 왕자’라고 불렀다. 제대 후 국립국악원에 들어간 그는 머지 않아 정악단의 중추적 인물이 됐다. 그의 스승이기도 한 김준현 명인이 40대 중반에 세상을 뜨는 바람에 이왕직 아악부 출신의 40~50대 선배들과 함께 무대에 서야만 했다. 피리가 정악을 맨앞에서 이끄는 만큼 그는 악단의 리더인 ‘목(目)피리’ 자리도 떠맡았다. 그는 “내가 음악적으로 출세를 빨리 했다. 스승님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26살 때 대를 잇게 됐는데, 다른 선생님들이 많이 도와주신 덕에 잘 해낼 수 있었다”며 “피리 정악과 대취타라는 별개의 장르는 하나로 아우르는 인간문화재로 인정받은 것 역시 당시 선생님들의 가르침 덕분이라고 생각한다”고 회고했다.

정악은 기본적으로 악단이 연주하는 합주 음악이기 때문에 연주자의 이름을 딴 ‘류(流)’가 없다. 하지만 그는 1972년 자신의 이름을 내건 ‘정재국류 피리산조'를 완성하며 우리나라 최초의 피리독주회를 개최, 정악 연주자이면서도 민속악과 창작국악 분야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그래도 그에겐 사명감 속에서 지켜온 정악에 대한 애정이 클 수 밖에 없다. 이번 ‘정악, 새로움을 더하다’ 공연도 그가 정악의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나왔다.

그는 “정악은 민속악에 비해 스타 연주자가 나오기 어렵다. 합주음악을 하는 악단의 구성원으로 이름을 알리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국악계의 인기있는 연주자들은 대부분 독주자 활동이 가능한 민속악 출신이다”며 “정악을 하려면 참을성과 체력 그리고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연주자로서 박수도 많이 받지도 못하기 때문에 끼가 넘치는 사람은 정악을 못한다”고 피력했다.

5월 예술감독을 그만둔 뒤에도 그는 기회가 되는대로 무대에 설 예정이다. 흔히 50살이 넘으면 피리를 부는 것이 힘겨워지지만 그는 아직까진 자신이 있다. 그는 “70대에도 현역으로 연주하는 사람은 아마도 내가 처음이지 않을까 싶다. 후배나 제자들이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갈 계획이다”고 밝혔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