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덕영 장로 칼럼] 배신이라는 이름의 이야기

입력 2016-03-21 15:28

요즘 정치하는 분들의 입에서 ‘배신의 정치’라는 말이 오르내린다. 한쪽에서는 “배신자에게는 국회의원 공천을 절대 줄 수 없다”고 하고, 한쪽에서는 “국민의 뜻을 무시한다”며 논쟁이 한참이다. 동지라고 생각해 굳게 믿고 동고동락하며 권력도 주고 국회의원도 시켜 주었는데 힘이 생기니 대적하는 행동을 했다며 분노하는 모습이다.

이는 정치인들만의 일은 아니다. 어느 학교의 이사장이 굳은 신뢰를 갖고 총장을 임명했는데, 이 총장이 오히려 문제를 만들어 이사장을 쫓아내고 본인이 모든 학교 조직을 장악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작은 회사의 경우 사장이 외국 출장을 갔다 와보니 제일 믿었던 전무가 사원들과 공모해 사장을 몰아내고, 거래선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회사를 빼앗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특히 오파상의 경우 흔히 있는 일이라고 한다.

역사 속에도 있다. 로마의 황제였던 시저는 자신의 양아들에 의해 살해된다. 이유는 민주주의를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때 시저가 남긴 유명한 독백이 바로 “브루투스 너마저…” 라는 외마디였다.

배신은 교만으로부터 나온다. 교만은 사탄이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욕심에서 비롯되었다. 배신은 곧 사탄의 생각이며 겸손은 곧 예수님의 생각이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속담이 있다.

예수님도 가롯 유다로부터 배신을 당하셨다. 예수님은 가롯 유다를 신임하시고 모든 재정을 맡기셨다. 지금으로 치자면 재무 담당 책임자다. 은 30냥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가롯 유다의 죄는 결국 자살이라는 최악의 벌로 귀결됐다. 그는 성경에서 제일 추악한 인물로 전해진다.

그뿐인가. 지금도 아들로부터 횡령이나 배임으로 고발당해 수감 중인 기업인이 적지 않다. 또 어느 정치인은 부인에게, 어느 기업가는 평생 모시는 정치인에게 배신을 당했다고 유서를 써놓고 원수를 갚았다는 신문 기사는 우리를 무척 슬프게 한다.

‘배신의 정치’라는 단어는 이제 없어져야 할 단어다. 믿고 신뢰할 수 있는 정치 풍토가 정말 그리워진다.

난 신입사원 면접을 볼 때 스펙보다 인격을 중요하게 본다. 대부분의 기업들도 이런 부분에 공감할 것이다. 어느 대기업은 점쟁이까지 대동하고 면접시험을 보더라는 일화는 아주 유명하다.

아무리 실력이 출중해도 반골 기질이 보이면 골라냈다고 한다. 사실 요즘도 회사 면접시험의 중점 관찰 대상은 이런 항목들이다. 그래서 부모님에 대해서도 물어보는 등 이력서 상에서 이런 점들을 찾아내려고 노력한다고 한다. 그 사람이 과연 믿을 만한지 아닌지가 무척 중요한 사회다.

요즘 기업은 스펙보다 사람의 됨됨이를 깊이 따진다. 특히 돈을 관리하는 부서 등 중요 부서의 사람은 승진할 때에도 이런 점을 따지고, 회사가 어려울 때 자신의 이익보다는 회사 편에서 일할 사람인가를 중요하게 관찰해 임명한다고 한다.

성경도 배신의 문제는 엄히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도 배교를 하면 이는 죄 사함을 받을 수 없는 중대한 범죄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하버드에서 신학을 공부했음에도 스님이 된 사람을 보면서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예수님으로도 부족해 점쟁이에게 물어보는 기독교인을 보면서 예수님이 과연 이들을 어떻게 생각하실까 걱정이 앞선다.

예수님이 시장하시어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했으나 열매가 없자 저주하시니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랐더라는 성경 구절을 생각해 보면서, 예수님이 나에게 물질과 재능과 건강을 모두 주셨는데 이것을 내 것이라고 생각해 예수님의 마음을 슬프게 하고 있지는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모두에게, 신앙인에게도 해당되는 ‘배신이라는 이름의 이야기’를 의미 깊게 생각해 본다.

한국유나이티드문화재단 이사장·갈렙바이블아카데미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