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협정은 한국 외교의 성과물... 익숙한 비판론에 맞선다

입력 2016-03-06 14:31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은 회담이 시작된 배경, 교섭 상대국이었던 일본의 과거 역사에 대한 인식과 태도, 교섭과정에서의 미국의 직간접적인 관여, 한국의 빈약한 외교 인프라, 경제발전 등 당시의 시대적 요구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한국의 외교 교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성과물로 인정받고 재평가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한일협정을 바라보는 시각은 당시는 물론 지금도 비판 일색이었다.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이끌어내지 못했으며, 일본 정부에 대한 개인청구권마저 소멸시켰다는 게 비판의 골자를 이룬다. 최근 출간된 ‘대일외교의 명분과 실리’(역사공간)는 압도적인 비판론에 둘러싸인 청구권협정을 한국 외교의 성과물로 재평가하려는 대담한 시도를 보여준다. 저자는 동북아역사재단 국제표기명칭대사로 재직 중인 외교부 공무원 유의상(57·사진)씨로 동북아1과장 등을 지낸 ‘일본통’이다. 저자는 공개된 한일 외교문서를 통해 청구권 교섭과정을 꼼꼼하게 복원해내고, 청구권협정 비판론의 문제점과 한계를 지적한다.

한일회담은 미국이 설계한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근거로 시작됐으며, 공산세력을 막기 위해서 패전국 일본을 다시 부흥시키고자 했던 미국은 한국이 일본에 대해 식민지지배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한일회담에서 한국이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여지는 애초부터 제한적이었다는 것이다.

일본은 회담이 시작된 이래 단 한 차례도 식민지지배에 대한 배상이나 보상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의 일반적 인식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국제질서가 제국주의를 경험한 국가들에 의해 구축된 탓에 식민통치에 대한 배상과 청산을 상정한 국제규범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당시 국가 차원에서 식민통치국을 상대로 식민지배에 대한 청산을 요구한 나라는 한국과 리비아 이외에는 없었다.

저자는 “한국이 청구권협정을 배상이 아닌 경제협력 방식으로 해결하는 타협을 이룰 수밖에 없었다”면서 “비록 청구권협정의 내용에 일본의 사죄 또는 보상에 관한 표현을 포함시키지는 못했지만, 명칭에 청구권이라는 표현을 명기함으로써 청구권문제의 해결이 과거를 청산한다는 의미가 있음을 분명히 했다”고 평가했다.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받은 청구권 금액이 너무 적은 게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서는 “일본은 청구권문제와 관련하여 ‘상호포기(한국의 대일청구권과 일본의 대한청구권에 대한 상호포기)+α’에서 ‘α’가 한국에 제공해야 할 부분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또 한국정부가 개인청구권을 포기하고 국가차원의 일괄타결방식으로 청구권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법적 근거와 사실증거를 통하여 청구권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일본 측의 고의적인 증거인멸, 국내의 증거보존 불충분, 사실관계의 입증곤란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책 마지막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검토한다. 저자는 “청구권협정의 교섭과정 분석결과를 놓고 볼 때,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양국 간에 중요한 교섭대상의 하나로 토의된 적이 없음은 분명하다”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되었다는 일본정부의 주장은 협정에 대한 매우 자의적인 해석에 근거를 둔 잘못된 주장”이라고 비판했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