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배우고 까맣게 잊어버렸던, 보통사람들에게는 발음조차 생소한 정치판 용어인 ‘필리버스터’가 마치 일상용어나 되는 것처럼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고 있다.
그 경위야 이미 다 알려져 있으니 구구절절 되옮길 것도 없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야당의 필리버스터를 두고 “어떤 나라에서도 있을 수 없는 기막힌 현상”이라고 한 것은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다른 나라에도 물론 있을 뿐 아니라 기막힌 현상도 아니기 때문이다.
필리버스터는 당초 ‘해적질’이나 ‘노략질’을 뜻하는 네덜란드어 'viribuiter'가 스페인으로 건너가 'filibustero'가 됐다가 이 말이 19세기 중반 다시 영어로 넘어오면서 채택된 군사용어였다. 하지만 이내 소수파의 의사진행방해를 의미하는 정치용어로 정착됐다(그런 의미로 이 말을 가장 먼저 쓴 이는 1853년 미국의 앨버트 브라운 하원의원이었다).
그러나 정작 필리버스터는 근대의 산물이 아니라 일찍이 고대 로마에서부터 볼 수 있는 정치현상이었다. 당시의 가장 유명한 필리버스터 정치인으로 원로원 의원 소(小) 케이토가 있다. 공화정 당시 로마 원로원은 일몰까지 모든 의사일정을 마치도록 돼있었기 때문에 끝도 없는 케이토의 장광설로 인해 해가 넘어가면 표결이 무산되기 일쑤였다고 한다.
같은 이름을 지닌 증조부와 구별하기 위해 보통 소 케이토로 불리는 이 시저 시대의 웅변가 겸 정치가는 청렴결백함으로 명망이 높았는데 당대 최고의 권력자이던 시저의 정책(이를테면 기원전 59년의 토지개혁 같은 것) 추진을 필리버스터로 막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긴 그 먼 로마시대까지 갈 것도 없다. 요즘도 세계 각국에서 필리버스터가 심심치 않게 소수파 정치인들에 의해 애용되고 있거니와 필리버스터로 유명한 영화도 있다. 전설적인 미국 감독 프랭크 카프라가 만든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Mr. Smith Goes to Washington)’.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오즈의 마법사’ ‘역마차’ ‘폭풍의 언덕(윌리엄 와일러 연출, 로렌스 올리비에, 멀 오베론 주연)’ 등 명작들이 쏟아져 나온 1939년에 함께 나온 이 영화는 젊은 제임스 스튜어트를 용기 있는 양심적 미국인의 전형으로서 톱스타의 자리에 올려놨을 뿐 아니라 후대에 ‘최고의 정치영화’라는 평을 듣게 하면서 스튜어트가 일부 상원의원들의 사욕을 위한 입법을 저지하기 위해 장장 24시간 동안 필리버스터를 하는 시퀀스를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으로 만들었다.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만 혈안이 된 노회한 정상배들에 의해 꼭두각시 노릇이나 하라고 워싱턴 정가(상원)에 끌려온 시골 보이스카웃 대장이 그러나 정의와 진실, 이상을 위해 그들과 대결해 결국은 이긴다는(앉는 것은 물론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연단에 선 채로 쉴 새 없이 떠들어야 하는 필리버스터를 통해) 이 동화 같은 영화는 다수의 견해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민주주의의 맹점을 필리버스터라는 제도를 통해 보완 또는 견제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같은 필리버스터로 이루려는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스미스씨의 경우 필리버스터를 통해 이루려던 목표는 일부 상원의원이 사리(私利)를 채우기 위해 추진하는 댐 건설을 저지하고, 그 지역에 공공의 이익을 위한 보이스카웃 야영장을 지으려는 것이었다. 누가 봐도 누가 옳은지 명백하다.
그러나 작금 우리 국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필리버스터 소동은 누가 타당한지 분명하지가 않다. 입법추진 쪽이나 반대 쪽이나 다 맞는 것도 같고 다 틀린 것도 같다. 다만 국정원의 억압적 국민 감시 등 아직 현실화하지 않은 기우(杞憂)를 당장 현실의 위험인양 호도하는 것은 옳지 않아 보인다.
영화 얘기를 하려던 것이 정치평론으로 흘렀다. 영화 얘기로 돌아가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와 같은 장르에 속하는 ‘정치영화’들을 알아보자. ‘정치영화’라 하면 영화를 오로지 선전도구로 삼는 공산주의가 맨 먼저 떠오른다.
영화학도들의 교과서격인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전함 포템킨(1925)’만 해도 몽타주기법을 도입한 고전 걸작으로 추앙받지만 내용은 소련 공산혁명을 찬양하는 정치영화일 뿐이다. 그런가 하면 독재의 폐해와 참상을 끊임없이 고발한 그리스의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도 빼놓을 수 없다. 이브 몽탕과 장 루이 트랑티냥이 주연한 ‘Z(1969)'가 가장 유명하다.
미국의 대중잡지 배니티 페어는 이와 관련해 최고의 정치영화 25편을 선정했다(실제로는 동률 영화 2편이 추가돼 27편이다). 개중에는 많이 알려진 영화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다. 또 미국영화 중심이다. 하지만 이 장르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한번쯤 볼 만한 영화들을 망라하고 있다. 작품명과 제작년도, 감독, 주연배우를 간략히 소개한다.
25. 조언과 동의(Advise and Consent/1962/오토 프레밍거/헨리 폰다, 찰스 로튼)
24. 대통령의 사람들(All the President's Men/1976/앨런 파큘라/로버트 레드포드, 더스틴 호프먼)
23, 후보자(The Candidate/1972/마이클 리치/로버트 레드포드)
22. 선거(Election/1990/앨릭잰더 페인/매튜 브로더릭)
21. 링컨(2012/스티븐 스필버그/대니얼 데이 루이스)
20. 왝 더 독(Wag the Dog/1997/배리 레빈슨/로버트 데니로, 더스틴 호프먼)
19. 인 더 루프(In the Loop/2009/아만도 이아누치/제임스 갠돌피니)
18. 닥터 스트레인지러브(1964/스탠리 큐브릭/피터 셀러즈)
18. 페일세이프(Fail Safe/1964/시드니 루메트/헨리 폰다)
17. 대부 2(1974/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알 파치노, 로버트 데니로)
16.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
15. 찬스(Being There/1971/핼 애쉬비/피터 셀러즈)
14. 여왕(The Queen/2006/스티븐 프리어즈/헬렌 미렌)
13. 만추리언 캔디데이트(The Manchurian Candidate/1962/존 프랑켄하이머/프랭크 시나트라, 로렌스 하비, 앤젤라 랜스버리)
12. 찰리 윌슨의 전쟁(Charlie Wilson's War/2007/마이크 니콜스/톰 행크스, 필립 시모어 호프먼)
11. 군중 속의 얼굴(A Face in the Crowd/1957/엘리아 카잔/앤디 그리피스)
10. 밀크(2008/거스 밴 샌트/숀 펜)
9. 모두 왕의 부하들(All the King's Men/1949/로버트 로센/브로더릭 크로포드)
8. 5월의 7일간(Seven Days in May/1964/존 프랑켄하이머/버트 랭카스터, 커크 더글러스)
7. 위대한 맥긴티(The Great McGinty/1940/프레스턴 스터지스/브라이언 돈레비)
6. 미국 대통령(The American President/1995/로브 라이너/마이클 더글러스, 아네트 베닝)
5. 불워스(Bulworth/1998/워렌 비티/워렌 비티)
4.경쟁자(The Contender/2000/로드 루리/조운 앨런, 제프 브리지스, 게리 올드먼)
3. 시크릿 아너(Secret Honor/1984/로버트 올트먼/필립 베이커 홀)
3. 닉슨(1995/올리버 스톤/앤소니 홉킨스)
2. 더 베스트 맨(The Best Man/1964/프랭클린 섀프너/헨리 폰다, 클리프 로버트슨)
1. 백악관 위의 가브리엘(Gabriel over White House/1934/그레고리 라 카바/월터 휴스턴).
김상온(프리랜서 영화라이터)
[김상온의 영화이야기] (59) 필리버스터와 정치영화
입력 2016-02-29 1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