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석(素石) 이철승, 해방정국 학생운동 1세대 지도자...70년대 DJ.YS와 경쟁

입력 2016-02-27 16:20

향년 94세의 일기로 27일 타개한 소석(素石) 고(故) 이철승 전 신민당 대표는 한국 정치사의 한 가운데서 평생을 살아온 야권의 정치원로로서, 그의 삶이 한국현대사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전주고와 고려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고인은 해방직후인 1946년 반탁전국학생총연맹 중앙위원장과 전국학생총연맹 대표의장으로서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주도해 학생운동 1세대로도 꼽힌다. 1947년 한반도를 분할통치하며 한반도의 장래를 논의했던 미소공동위원회에 학생대표로서 예비회담에 참여하기도 했다.

1954년 제3대 총선 때 전주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돼 정치권에 진입했으며 이후 4·5·8·9·10·12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7선 의원을 지냈다.

1955년 현재 야권이 뿌리로 내세우는 민주당 창당을 주도했고, 국회 국방분과위원장(1960년)·국회부의장(1973년)·신민당 대표최고위원(1976년) 등을 지내는 등 제3, 제4 공화국시절 야당 핵심인사로 활동했다.

고인은 1961년 5·16 쿠데타 직후 군부에 의해 정치규제를 당해 해외망명길에 올랐고, 1980년에도 신군부의 정치쇄신법에 의해 정치규제를 당하기도 했다.

특히 고인은 1970년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김영삼(YS),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함께 '40대 기수론'의 한 축을 이뤄 경쟁한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이 전 대표는 중도에 경선을 포기하고 YS와 단일화를 이뤘으나, 1차 투표에서 YS가 과반 득표에 실패하자 2차 투표에서는 DJ 지지로 돌아서 DJ가 2차 투표에서 '대역전 드라마'를 쓰고 대선 후보로 당선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고인과 DJ간에는 밀약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 전 대표는 제1야당인 신민당 대표 시절 "안보에는 여야가 없다"며 초당적 외교를 주장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당시 그는 미국의 카터 정부가 '주한미군 철수' 카드로 박정희 대통령을 압박했을 때 야당 당수(黨首)로서 일본과 미국을 찾아 주한미군 철수 방침을 접어달라고 호소했다.

이로 인해 고인은 '사쿠라(정부·여당과 야합하는 야당 정치인)논쟁'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 대표는 "나라가 있어야 여당도 있고 야당도 있는 것 아니냐"며 "주한미군 철수는 북한의 적화통일 야욕에 말려드는 꼴"이라고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12대 국회를 끝으로 현실 정치를 떠난 고인은 보수인사로서 사회영역에서 왕성하게 활동했다.

그는 자유민주총연맹 총재(1987년)를 비롯해 건국애국단체총연합회 회장(1987년), 자유민주민족회의 대표상임의장(1994년), 서울평화상문화재단 이사장(1996년), 건국 50주년 기념사업회 회장(1998년), 자유민주비상국민회의 대표상임의장(2005년), 대한민국헌정회 회장(2007~2009년) 등을 지냈다.

고인은 이날 새벽 숨을 거두기 전까지 병상에서 북한 핵실험과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 관련 뉴스를 찾았다고 한다.

헌정회 원로위원회 의장이었던 이 전 대표는 최근까지 출근하자마자 외신 뉴스를 번역해 보고받았으며, 특히 남북 관계 이슈에 큰 관심을 보였다고 헌정회 원로위원회 부의장인 정재호 전 의원이 연합뉴스에 전했다.

이달 초 얻은 감기 증세가 악화해 입원하면서 북핵 문제를 두고 "세월이 하수상하다"고 걱정했으며,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을 때도 "안보시국이 엄중한데 무슨 사회장이냐. 가족장으로 간소하게 치러달라"고 주위에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영석 기자 ys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