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 '백색 예술품'이 불타는 까닭은

입력 2016-02-23 15:35 수정 2016-02-23 16:30
출처: 케이프아르고스
출처: 케이프아르고스
지난 16일(현지시간) 남아프리카공화국 수도 케이프타운. 도시를 대표하는 대학인 케이프타운대학(UCT) 캠퍼스에 화형식이 벌어졌다. 식민주의와 인종주의를 반대하는 구호 속에서, 네모난 액자에 담긴 초상화와 조각상이 화염에 불타고 돌에 맞아 으깨졌다.

지난해 시작된 남아공 대학생들의 예술품 파괴 시위가 해가 바뀌어도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 가운데 시위대가 겨냥한 식민주의나 인종주의와는 상관없는 가치 있는 예술품마저 파괴되고 있다. 갈수록 깊어가는 흑백 간 빈부격차가 시위 과격화의 이유라는 분석이 나온다.



◇ 백색이 불탄다

지난 21일(현지시간) 발행된 영국 주간 이코노미스트 최신호에 따르면 이 시위는 지난해 UCT 학생들이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식민 통치자이자 침략자였던 ‘아프리카의 나폴레옹’ 세실 로드(1853~1902)의 조각상을 없애자고 외치면서 시작됐다. 식민지 침탈의 주역인 인물의 조각상이 캠퍼스에 설치된 건 인종차별적인 일이라는 주장이었다.

동상은 학생들의 요구로 사라졌지만 시위는 그칠 줄 몰랐다. 이들은 입법 수도 케이프타운에 위치한 남아공 의회로 행진해 높은 대학수업료 등 다른 이슈에 대해서도 항의하고 나섰다. 이로 인해 대학 수업료 인상은 동결됐다.

요구조건이 받아들여지면서 사그라지나 싶었던 시위는 여름방학이 끝나면서 오히려 더 큰 규모로 번져나갔다. 10월이 되자 학생들은 기숙사 공간 등에서만 머물렀던 지난 시위와 달리 캠퍼스 곳곳에서 식민시대와 관련된 미술품을 가져와 불태우기 시작했다. 예술품들은 ‘식민화의 상징’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불타 없어졌다. 한 학생은 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백색이 불탄다(Whiteness is Burning)'이라는 문구와 함께 얀 스뮈츠(1870~1950) 전 수상의 초상화를 불태우는 사진을 올리기도 했다.



◇ 잿더미가 된 예술품

시위가 과격화하면서 무분별한 예술품 파괴로 번지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들 시위대에 의해 불타 없어진 그림 중에는 반인종차별주의자이자 흑인 화가인 케레세모스 리차드 바홀로의 그림 ‘학문 자유의 고귀한 횃불(Extinguished Torch of Academic Freedom)’ 등 5점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이 대학의 최초 여성입학자인 마리아 퓰러의 조각상도 부서졌다. 이 가운데 예술품을 파괴한 학생들이 경찰에 재물손괴혐의 등으로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당시 비슷한 시위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났다. 영국 오리엘대 역시 세실 로즈의 조각상을 없앴고 미국 텍사스대 역시 지난해 8월 남북전쟁 당시 남부연합 대통령을 지낸 제퍼슨 데이비스(1808~1889)의 동상을 끌어내린 바 있다. 그러나 남아공처럼 장기간 과격 시위로 번진 예는 드물다.



◇ 진짜 문제는 ‘흑백’ 빈부격차

이코노미스트는 세계 다른 지역들보다 남아공에서의 시위가 유독 과격화된 데 대해 최근 극심해진 인종간 빈부격차가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높은 수업료를 지불하기 힘든 흑인 학생들의 불만과 맞물려 시위가 커진 것이라는 설명이다.

남아공은 세계 최고 수준의 빈부격차에 시달리고 있다. 세계은행(WB)에 따르면 빈부격차를 가늠하는 척도인 지니계수는 남아공에서 2008년 0.70으로 2013년 OECD가 집계한 한국 지니계수 0.347보다 2배 이상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지니계수는 0(완전평등)에서 1(완전불평등)사이의 지수로 1로 가까이 갈수록 불평등하다는 의미다. 인구 10%가 국가소득의 58%를 차지하고 있으며, 하위 10%는 0.5%의 소득을, 하위 50%는 8%의 소득만을 차지하고 있다.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 폐지 전부터 백인사회에 집중된 부가 여전히 배분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지 일간 케이프아르고스 등에 따르면 학생들은 흑인거주지의 비참한 삶을 상징하는 검은색 오두막을 캠퍼스에 세우기도 했으며, 이 과정에서 오두막을 철거하려는 학교 직원과 충돌해 학교 부총장의 집무실이 불타기도 했다.

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